문화 책 이야기

예링 도서관

이춘아 2020. 10. 31. 07:41

조금주, [우리가 몰랐던 세상의 도서관들], 도서출판 나무연필, 2017.

‘덴마크의 예링 도서관’

덴마크 북부의 노르휠란주 예링에 있는 쇼핑몰 메트로폴. 이곳 2층에는 예링 도서관이 있다. 통상적으로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공공도서관들은 독리적인 건물을 보유하고 있는데, 예링 자치구는 독특하게도 40개 상점이 입주해 있는 이 쇼핑몰과 30년 장기 임대 계약을 맺고 이곳에 도서관을 만들었다. 우리에게는 다소 낯선 경우다. 

새로 도서관을 건립한다면 부지를 매입하고 건물을 신축하는 데 막대한 자금을 필요할 텐데, 장기 임대 방식은 재정 부담을 덜 수 있으니 나쁘지 않아 보였다. 많은 쇼핑몰이 그러하듯, 메트로폴도 도심 한복판에 있으며 유동 인구도 많고 주민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이용자가 도서관에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도서관이 이용자의 일상에 다가가려고 노력하는 것은 꽤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시도일 것이다. 

2018년 통계를 보면, 도서관이 있는 예링 자치구는 6만 5천여 명이 거주하는 소도시다. 예링 도서관은 예링 자치구의 중앙도서관으로, 자치구에는 이외에 4개의 분관 도서관과 이동도서관이 있다. 도서관은 2008년에 개관했으며, 쇼핑몰 내에 있지만 5090제곱미터 규모로 결코 작은 크기는 아니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쇼핑몰 메트로폴은 도서관 건축으로 유명한 슈미트 함메르 라센 아키텍츠에서 디자인했고, 도서관 인테리어는 보스 앤드 피오르에서 맡았다. 

공공도서관은 보통 이용자의 연령에 따라 성인실, 청소년실, 어린이실 등으로, 자료의 성격에 따라 일반 자료실, 정기간행물실, 미디어 자료실 등으로 공간을 구획한다. 또한 이용 목적에 따라서는 서고, 열람실, 강의실, 전시실, 개인 학습실, 컴퓨터실 등으로 나누기도 한다. 그런데 예링 도서관은 전체 공간을 분할해서 벽을 두고 방을 만드는 공간 구획을 하지 않은 채 통째가 하나의 커다란 열람실로 이루어져 있다. 

소란스럽고 활동적인 어린이, 조용한 학습 공간을 원하는 청소년, 컴퓨터 작업을 원하는 직장인, 다양한 문화 활동을 즐기길 바라는 지역 주민, 명상이 가능할 정도로 정숙한 공간을 원하는 장년 세대..... 이렇게 다양한 연령과 취향의 이용자들을 하나의 열람실 안에서 어떻게 만족시킬 수 있을까? 이용자들의 다양한 요구가 어떻게 한 공간 안에서 조화롭게 구현될 수 있을까? 그런데 이게 진짜 가능하기는 한 걸까?

도저히 불가능할 것만 같은 이 도전은 단순하면서도 혁신적인 디자인 아이디어 덕분에 성공을 거두었다. 보스 앤드 피오르는 도서관의 상징으로 붉은 색 띠를 상정한 후 이를 바탕으로 공간을 매끄럽게 중재해갔다. 도서관의 전체 컬러는 환한 흰색, 이는 기본적으로 차분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거기에 붉은 띠가 들어오면서 자칫 무미건조할 수 있는 흰색 공간을 생동감 도는 활기찬 곳으로 만들어낸다. 동물의 촉수 혹은 사람의 정맥처럼 쭉쭉 뻗어 있는 붉은 띠는 도서관 전체를 휘감아 돌면서 내부 공간의 안내 역할도 담당한다. 그런가 하면 위아래를 넘나들며 공간을 아울러서 커다란 도서관에 통일성도 부여한다. 

붉은 띠는 도서관 구석구석에 골고루 스며들어 있다. 위로 올라가고 벽을 통과하고 밑으로 내려오는가 싶더니, 때로는 서가와 책상, 전시 공간을 뚫고 지나간다. 학습 공간도 스쳐가고, 무대와 놀이 시설이 있는 활동 공간도 가로 지른다. 입구의 바닥에서 시작된 붉은 띠는 책장이나 문으로도 사용되고, 이용자들이 앉아 책을 볼 수 있는 책상으로도 변하며, 각종 물건을 올려놓는 진열장으로도 이용된다. 여기에 더해 일인용부터 그룹용까지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는 의자들이 이 공간의 포인트가 되어준다. 

도서관에는 이용자의 연령이나 공간의 성격을 구분하는 표지나 구획이 거의 없다. 도서관 자체가 하나의 큰 방이며, 붉은 띠가 각각의 주제로 표현된 작은 구역들을 가르기도 하고 연결하기도 한다. 이 안에는 마을 사람들이 만나 차 한잔 마시면서 수다를 떨 수 있는 카페도 있고, 주변 사람들의 방해를 받지 않는 조용한 작업 공간도 있으며, 사색과 영감의원천이 될 만한 독서 공간도 있다. 어린이들이 신나게 놀 수 있는 놀이 공간도 있고, 주제별 전시 공간도 있으며, 다양한 문화 행사가 열리는 무대도 있다. 

예링 도서관은 ‘서점 벽’이라고 불리는 책 전시 서가도 눈에 띈다. 처음에는 크기가 큰 책들을 전시하다가 나중에는 주제별 혹은 특징별로 전시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번은 각각의 책 표지 색깔을 맞춰서 서가 전체를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갯빛으로 만드는 전시도 했단다. 서점 벽은 서점의 서가처럼 바닥부터 천장까지 이어지며, 손이 잘 닿지 않는 서가 위쪽책들을 꺼낼 수 있는 사다리도 준비되어 있다. 

어린이 열람 공간에 있는 다양한 놀이 기구들도 시선을 잡아끈다. 어린이들에게 이 공간은 책 읽는 곳일 뿐만 아니라 몸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놀이와 체험의 장소이기도 하다. 녹색 인조 잔디, 미끄럼틀, 비눗방울 벽, 책 읽는 파이프 같은 창의적인 놀이 기구들은 책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주면서 어린이들이 자연스럽게 책에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책과 놀이가 함께 있는 공간인 셈이다. 물론 이곳에서는 책을 보다가 친구들과 조금 떠들어도 괜찮고, 놀다가 지치면 잠깐 눈을 붙여도 된다. 

예링 도서관의 VIP는  ‘very important person’이 아니라  ‘very important parents’다. 즉 이곳은 도서관의 매우 중요한 이용자인 부모를 위한 독점적 공간이다. 아이와 함께 도서관을 방문한 부모들은 여기에서 커피를 마시며 잡지와 책을 읽는다. 서가에는 아동에 관한 책을 비롯해서 결혼 생활, 정원 손질, 뜨개질 등에 관한 책이 꽂혀 있다. 다른 서가에서 가져온 책을 이 코너에서 읽어도 무방하다. 

예링 도서관에서는 어린이와 청소년, 부모가 한곳에서 함께 어울리기도 하고 서로의 구역으로 옮겨 다닐 수도 있다.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디자인으로 많은 찬사를 받았고, 그 덕분에 전 세대를 아우르는 이용자들이 매일 도서관 곳곳을 점령하고 있다. 하루 평균 1000여 명이 이용하는 이곳은 그렇게 예링 시민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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