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거닒

이춘아 2020. 11. 3. 00:14


지속적인 걷기, 상념 없이 그저 자신을 맡기는 단조로운 움직임은 정화의 길이 될 수도 있다. 많은 것을 떨쳐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내적 소요, 나를 화나게 하고 내 속을 뒤집던 것이 고요해진다. 나는 내적 동요, 영혼의 쓰레기로부터 다 벗어난다. 많은 사람들이 걷기를 통해 고요해지는 체험을 하는데, 침묵하며 앉아 있는 경우보다 더 고요해진다. 신경질적이며 성마른 사람들에게는 걷기, 거닒이 가만히 앉아 있는 것보다 유용하다. 그들은 걸을 때 온갖 것들에 더 쉽게 신경을 끊을 수 있다.

덴마크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모든 근심, 심지어는 질병까지 ‘걸으면서 떨치는’ 경험을 했다.

“무엇보다 걷기의 즐거움을 잊지 말지어다! 나는 매일 평안을 향해 걸으며 모든 질병에서 벗어난다. 내 최고의 사유들은 걸으면서 얻었으며, 걸어서 떨칠 수 없을 만큼 무거운 근심을 나는 알지 못한다.”

우리를 근심과 질병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걷기의 능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길을 걸으며 우리는 지속적으로 몸을 움직이고, 그로써 우리 정신 안에서도 무엇인가 움직인다. 끊임없이 땅에 닿았다가 다시 떨어지는 단조로운 발걸음은 우리 몸에 고착되어 항상 영적 갈등을 야기하는 긴장을 완화한다. 이렇게 우리는 내적 소요와 근심을 떨쳐 내며 점차 고요해지고 원만해진다. 의식적으로 발을 딛고 걸음을 옮김으로써, 육과 영을 긴장시키고 경직시키며 오염시키는 모든 것을 흘러가 버리게 한다. 이리저리 걷고 나면 내적으로 정화되고 정리됨을 우리는 느낀다. ‘걸으면서 떨쳐 낸’ 것이다.

- 안셀름 그륀, [길 위에서], 분도출판사,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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