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어느 것도 같지 않다

이춘아 2021. 3. 14. 07:06

마틴 슐레스케, [가문비 나무의 노래](유영미 옮김), 니케북스, 2013.


‘일정한 흐름 그리고 파격’

좋은 바이올린은 연주자와 교감합니다. 그런 바이올린은 연주자가 음을 빚어내게 하지요. 스스로 피어나고 빛을 발했다가, 곡이 요구할 때면 스스로 물러섭니다. 도공의 손끝에서 흙이 빚어지듯이, 울리는 음은 활 아래에서 빚어집니다. 좋은 바이올린은 음악가에게 음을 발견하라고 요구합니다. 

좋지 않은 바이올린은 공명이 약해서 길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아름다운 울림은 공명을 다루는 데서 생겨납니다. 공명을 다루는 일은 악기의 생명을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악기를 느낄 줄 알면 악기의 힘이 느껴지고, 악기가 주춤거리는 것도 느껴집니다. 나는 힘 있는 악기를 좋아하며, 특히 포르티시모에서 구름 같은 울림에 둘러싸이는 기분을 느끼곤합니다. 좋은 바이올린은 연주자에게 복종하지 않습니다. 그는 연주자와 같은 눈높이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연주자는 악기를 길들여야 합니다. 

사실 공명은 악기에 위험 요소입니다. 현이 균일하게 진동하는 것을 공명이 방해하기 때문이지요. 바이올린 몸체의 공명이 강할수록, 공명이 현의 진동에 영향을 미치고, 현의 진동을 방해합니다. 그러나 공명은 악기에 꼭 필요한 요소입니다. 공명이 없다면 악기를 다루기가 더 쉽겠지만, 그럴 때 울림은 생명을 잃습니다. 


‘공간을 여는 울림’

바이올린 소리를 들으며 인간 영혼의 음색을 생각해 봅니다. 바이올린이 내는 좋은 음의 비결은 ‘모순’에 있습니다. 모순이 울림에 입체감을 불어넣거든요. 매력적인 음은 언제나 여러 가지 요소를 지닙니다. 여러 요소를 품지 않은 울림은 단조롭습니다. 조절 가능한 여러 요소가 한데 있을 때, 음은 비로소 활기를 얻고 매력을 발산합니다. 다양한 음을 빚어낼 가능성이야말로 좋은 바이올린의 가장 중요한 시금석입니다. 좋은 울림은 입체적입니다. 좋은 음은 공간을 엽니다. 

내가 작업실에서 다루어 본 바이올린 중에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1721년에 제작된 스트라디바리우스였습니다. 그 바이올린은 절제된 소리에 명확한 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입체적 울림으로 공간을 가득 채웠습니다. 열정적이지만 날카롭지 않은 음. 쿰쿰한 지하실처럼 잦아들면서도 끝까지 분간할 수 있는 음. 이런 바이올린은 거친 음을 내도 조잡해지지 않으며, 높은음을 내도 천박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달콤하고 감각적이지요. 피아니시모는 부드러우면서도 숨이 막힐 것 같고, 포르티시모는 외치는 동시에 속삭입니다. 이 같은 모순은 깨지지 않습니다. 울림의 매력은 바로 이런 모순에 있습니다. 


‘장인의 지혜’

몇 년 전, 스트라디바리의 바이올린 세 대를 동시에 손보게 되었습니다. 거의 동시에 스트라디바리우스 세 대가 내 작업장으로 온 것은 커다란 행운이었습니다. 나는 그 특별한 기간에 스트라디바리우스들의 공통점을 연구할 수 있었습니다. 세 바이올린 모두 스트라디바리우스 제작의 황금기인 18세기 초에 탄생한 작품으로, 아주 부드럽고 깊은 음이 납니다. 평소에는 좀처럼 함께 나타나지 않는 두 가지 특성이 한데 모입니다. 부드러운 동시에 힘 있는 울림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사람을 구름으로 감싸듯, 자유롭고 경쾌한 연주가 탄생합니다. 그런 바이올린을 만날 때면 나는 작업에만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기가 어렵습니다. 바이올린들을 연주해 보고, 그것들이 내 작업장에 머무는 시간을 만끽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 

나는 세 바이올린이 단연 같은 창조자의 작품임을 느꼈습니다. 강한 동시에 풍성한 음색! 포르테로 연주할 때도 귀가 따갑지 않으며, 피아노로 연주할 때 역시 공간을 채우고도 남습니다. 그들의 울림은 빛나는 힘과 넓은 공간감을 지녔습니다. 칠 역시 아름다워 나무의 세포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이는 듯했습니다. 그들에게는 같은 ‘필체’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서로 같지 않습니다. 나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장인의 지혜는 판의 강도와 굴곡을 일정하게 유지하면서, 나무의 특성에 따라 각각의 바이올린에 개성을 부여했습니다. 스트라디바리는 자기 필체에 충실하면서도 저마다 다른 나무의 특성을 존중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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