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18년부터 660년까지 678년의 역사를 가진 백제는 우리나라 고대 왕국의 하나이다. 고구려를 세운 동명성왕(주몽)의 아들들(온조와 비류)이 고구려에서 갈라져 나와 교통이 편리한 한강 하류 일대에 새로이 나라를 세웠다.
신라나 고구려에 비해 출발이 빠르지는 않았지만, 4세기 중엽 근초고왕(재위 346~375)이 다스릴 무렵에 영토를 크게 넓히고 나라의 기틀을 확실히 잡으면서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강국이 되었다. 그리고 서해와 남해의 바닷길을 이용해 중국, 일본과 활발히 교역하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신라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멸망한 뒤로 유적과 유물이 잘 보존되지 못하고 역사를 밝혀줄 만한 기록도 제대로 남지 않았던 탓에, 백제의 역사와 문화는 신라와 고구려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처음 한강 유역에 자리 잡은 백제는 도읍지를 두 번 옮겼다. 위례성(서울), 웅진성(공주), 사비성(부여)이 백제의 세 도읍지이다. 마지막 도읍지였던 부여가 역시 백제 역사의 일부에 불과하긴 해도, 가장 백제답게 형성된 문화를 보여주기에 백제의 대표적인 고도가 되고 있다.
한성시대: 기원전 18~475년
백제의 건국 시조는 ‘온조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를 보면, 온조의 건국 신화에 이어 곧바로 그의 형 비류가 건국 시조라는 이야기가 나란히 나오기도 한다. 온조가 이끄는 세력에게 비류의 세력이 흡수되었다가, 이후 온조 계통의 왕들과 비류 계통의 왕들이 번갈아가며 지배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건국 신화에 시조가 둘이나 등장하는 것만큼이나 의문스러운 것은 건국 초기 왕이 살았던 왕성의 위치이다. 백제의 첫 도읍지는 한성으로, 지금 서울의 동남쪽 강동구와 송파구 일대에 해당하는 한강 유역이다. 1980년대 올림픽공원을 조성한 것을 계기로 몽촌토성이 처음 모습을 드러내면서, 이 성이 백제의 첫 왕성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1990년대에 몽촌토성의 북쪽, 곧 한강과 좀 더 가까운 곳에서 풍납토성에 대한 발굴이 진행될수록 규모가 몽촌토성보다 크고 출토 유물도 화려한 데다 그 수도 많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는 까닭이다.
백제의 한성시대는 493년 동안 지속되었지만, 그 자취를 만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미 완전히 도시화되었기 때문이다. 송파구 석촌동 일대에서 백제 초기의 무덤들(사적 243호 석촌동 고분군)이 발견되고 하남 미사리에서 마을 유적(사적 제269호 미사리 유적 고분군) 등이 발굴되었지만, 옛 백제의 진면모를 알아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백제 역사상 영토를 가장 크게 넓힌 왕은 근초고왕이다. 이 시기에 백제는 최고의 국력을 가졌고, 국제적으로도 높은 위상을 보였다. 그러나 근초고왕이 죽고 391년 고구려에서 광개토왕이 즉위하면서, 백제는 제 나라의 영역을 적극적으로 넓혀나가고자 하는 고구려의 위협을 이겨내지 못했다. 근초고왕 이후 여러 왕이 뒤를 이었으나, 백제는 번번히 고구려군에 좌절하며 한강 이북의 땅을 넘기고 말았다. 백제는 이러한 위기를 신라와의 동맹으로 뚫고 나가고자 했다. 그렇게 신라의 도움을 받아 고구려의 압박에서 한숨을 돌리는가 싶었는데, 475년에 고구려의 장수왕이 침공하면서 백제는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마저 피살당하는 큰 어려움에 빠졌다. 결국 한강 유역을 고구려에 넘긴 개로왕의 아들 문주는 남은 백성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가 웅진에 임시 수도를 마련했다.
웅진시대: 475~538년
사실 웅진은 한 나라의 도성이 되기에는 비좁았다. 그렇지만 당시 상황이 몹시 좋지 않았던 백제로서는 웅진으로의 천도가 최선의 선택이었다. 웅진은 동남서 삼면이 급한 절벽으로 이루어지고 북쪽은 금강이 흘러 외부 세력의 침략을 막는 데 최적이었다. 왕이 머무르던 공산성 자체가 산성인 것도 이와 같은 까닭이었다.
문주왕(재위 475~477)이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피살되고, 이어 삼근왕이 즉위했으나 2년 만에 일찍 죽고 말았다. 이어 왕위에 오른 이가 문주왕의 아우이자 곤지의 아들인 동성왕(재위 479~501)이다. 동성왕은 중국의 남조나 왜와 교류를 강화하고, 신라와도 혼인 관계를 맺으면서 굳은 동맹의 의지를 보였다. 백제는 신라와 함께 고구려와 싸워 승리를이끌어내는 등 안정을 찾아갔지만 귀족 세력과 힘을 겨루는 과정에서 동성왕이 피살을 당하는 바람에 또 다른 정치적 혼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듯 혼란한 시기에 왕위에 오른 이가 무령왕(재위 501~523)이다. 무령왕은 동성왕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남조, 왜, 신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하는 한편 권력도 안정시켰다. 여러 차례에 걸쳐 고구려의 침입을 막아냈고,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크게 이기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한성 시절에는 멀리 떨어진 지방을 옛 우두머리들이 통치하게 하였던 것과 달리 영산강 일대를 직접 통치함으로써 한층 더 튼튼해진 국력을 갖게 되었다.
백제의 웅진시대를 대표하는 유적도 바로 무령왕릉이다. 31명이나 되는 백제의 왕 가운데 무덤의 위치가 분명한 경우는 무령왕뿐이다.
무령왕을 이은 성왕(재위 523~554)은 고구려에 당한 치욕을 씻어 내는 한편으로 백제가 다시금 강성해지기를 꿈꾸었다. 가야 지역을 압박하며 성과를 얻어낸 성왕은 이에 자신감을 얻어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로 옮기는 천도를 계획하였다. 웅진이 임시 수도의 기능을 담당할 수 있지만, 부흥 강국이라는 백제의 꿈을 안팎에 드러내기에는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백제는 웅진시대의 문을 닫고 사비시대의 문을 활짝 열었다.
사비시대: 538~660
부흥 강국을 꿈꾼 성왕은 나라의 이름도 ‘백제’에서 ‘남부여’로 바꾸고, 중앙의 행정 기구와 지방 통치 조직, 군사 조직을 정비하고 주요 관직 체계와 관리의 등급 체계도 마련하면서 나라의 기틀을 다져나갔다.
고구려 안장왕이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성왕은 고구려 조정에 내분으로 인한 혼란이 시작되었음을 간파하고 동맹국인 신라에게 고구려 정벌을 제의했다. 551년에 고구려를 공격한 백제와 신라는 각각 한강 하류 지역과 한강 상류 지역을 빼앗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한강 탈환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동맹국이던 신라가 백제군을 기습하여 한강 하류를 앗아간 것이다. 건국 이래 영토를 가장 크게 넓힌 신라의 진흥왕은 죽령을 넘어 지금의 단양 지방까지 진출하면서(단양 적성비) 한강을 차지하여 서해를 통해 중국과 직접 교류하는 원대한 꿈을 꾸었던 것이다. 결국 553년에 120여 년간의 동맹은 깨어졌다. 백제는 배신을 눈치채지 못하고 신라의 급습에 속수무책으로 당했지만,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554년 성왕은 아들 창이 이끄는 정벌군을 관산성(옥천)으로 보내 신라와 대적하게 하고, 곧바로 자신도 그곳으로 향했다. 그러나 성왕은 이곳에서 신라군에 사로잡혀 죽고 말았다. 백제 부흥을 외치던 성왕의 비극적인 최후에 백제가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고구려를 향해 있던 백제의 적의가 신라로 바뀐 것은 물론이었다.
여러 차례에 걸쳐 신라를 공격했지만 성과를 내지 못하던 시기에 등장한 이가 무왕(재위 600~641)이다. 오늘날의 익산에 미륵사라는 큰 절을 창건했고, 신라의 선화 공주와 혼인한 것으로도 알려진 바로 그 ‘마동’이다.
무왕 또한 신라에 대한 원한이 깊어 무너뜨리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무왕의 집요한 공격을 혼자 힘으로 당해내기가 어려워진 신라는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와 당이 협공하자 전세는 다시 기울었다. 무왕이 641년에 세상을 떠난 뒤 의자왕(재위 641~660)이 왕위에 올랐다. 신라 정벌에 나선 의자왕이 대야성(합천)에서 큰 승리를 거두자, 신라는서라벌이 위태로워질 것을 염려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신라가 취한 정책이 외교를 통해 당나라의 지원을 받는 것이었다. 당나라에 당도한 신라의 김춘추는 태종으로부터 백제 정벌에 나서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처럼 나당 연맹군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상황에서도, 백제는 의자왕의 실정과 더불어 내부 권력에 균열이 생기면서 단합하지 못하고 있었다. 660년 당나라 소정방이 이끈 13만 대군과 신라 김유신이 이끄는 5만 군사가 백제 정벌에 나서자 백제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황산벌(논산)에서 계백이 이끄는 500여 명이 신라군에 맞섰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사비성은 함락되고, 이를 비관한 삼천궁녀가 뛰어내렸다는 슬픈 전설을 뒤로 남긴 채 백제는 최후를 맞이했다.
사비성 함락 후 곳곳에서 백제를 다시 일으키려는 움직임이 거세게 일었다. 하지만 663년 백제 부흥군의 마지막 보루였던 임존성(예산)에서의 전투를 마지막으로 백제 부흥 운동마저 사그라지고, 백제 땅에 살던 사람들은 신라의 백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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