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대여업에서 스트리밍 서비스로

이춘아 2021. 6. 12. 06:31

리드 헤이스팅스 & 에린 마이어, [규칙 없음] (이경남 옮김), 알에이치코리아, 2020


리드 헤이스팅스: “블록버스터 blockbuster는 규모가 우리의 1,000배야.” 2000년 초 텍사스주 댈러스의 르네상스타워 27층 드넓은 회의실로 들어서며, 나는 마크 랜돌프의 귀에 대고 그렇게 속삭였다. 그곳은 전 세계의 9,000개 가까운 비디오 대여점을 거느린, 홈 엔터테인먼트의 독보적 강자 블록버스터의 본사였다. 그들의 기업 가치는 60억 달러에 달했다. 

블록버스터의 CEO 존 아티오코는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수완이 뛰어난 전략가로 정평이 난 그는 도처에 깔린 초고속 인터넷이 이 산업의 판도를 완전히 바꾸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희끗희끗한 염소수염을 기르고 고급 정장으로 한껏 멋을 낸 그는 무척 여유가 있어 보였다. 

반면, 나는 초조한 기색을 감추느라 안절부절못했다. 마크와 나는 2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작은 스타트업을 운영 중이었다. 온라인으로 고객의 주문을 받아 우편 시스템으로 DVD를 대여해 주는 사업이었다. 100명 가량의 직원에, 가입 회원이 30만 명 정도 되는 불안한 신생 기업이었다. 우리의 예상 손실액은 그 해에만 총 5,700만 달러였다. 회사를 매각하기 위해 몇 달을 공들인 끝에, 겨우 안티오코와의 만남을 성사시킨 상황이었다. 

우리는 대형 유리 테이블에 둘러앉아 가볍게 환담을 한 후, 곧바로 흥정을 시작했다. 블록버스터가 넷플릭스를 인수한다면, 우리가 ‘블록버스터닷컴’을 개발하여 그들의 온라인 비디오 파트너로 운영하겠다고 제안했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신중한 자세로 이야기를 듣던 안티오코가 물었다. “우리가 넷플릭스를 인수한다면 얼마를 드려야 합니까?”
 5,000만 달러라고 답하자, 그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마크와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처진 어깨가 영 올라가지 않았다. 

그날 밤 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는데, 블록버스터의 6만 명 직원이 우리의 당돌한 제안을 듣고 폭소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안티오코의 시큰둥한 반응도 이해 못 할 것은 아니었다. 수백만 명의 고객과 막대한 수입, 남다른 수완의 CEO와 홈 무비의 동의어가 된 블록버스터 같은 거인이 무엇 때문에 손실을 감당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넷플릭스에 돈을 쏟겠는가? 거부하기 힘들 만큼 좀 더 낮은 액수를 제시했어야 했을까?

하지만 세상은 조금씩 변해갔고 다행히 우리 사업도 자리를 잡아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날의 만남 이후 2년이 지난 2002년, 우리는 넷플릭스를 상장했다. 그래도 블록버스터의 규모는 우리의 100배였다(50억 달러 vs. 5,000만 달러). 더구나 블록버스터의 소유주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가치가 높은 미디어 기업인 비아콤이었다. 그러나 2010년, 블록버스터는 파산을 선고했다. 2019년에 남아 있는 블록버스터 비디오 대여점은 오리건주 벤드의 단 한곳뿐이었다. 블록버스터는 DVD 대여업에서 스트리밍 서비스로 넘어가는 변화의 물결에 적응하지 못했다. 

2019년은 넷플릭스에서 주목할 만한 해였다. 우리가 제작한 영화 [로마]가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올라, 3개 부문에서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감독상을 받은 알폰소 쿠아론은 넷플릭스가 어엿한 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 변신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우편을 통한 DVD 대여업에서 탈피해 인터넷 스트리밍 서비스로 190개국가에 1억 5,000만 명의 회원을 확보했을 뿐 아니라, 자체 TV 프로그램과 영화를 생산해 전 세계에 보급하는 대형 제작자로 발돋움했다. 우리는 숀다 라임스, 조엘 코언과 이선 코언 형제, 마틴 스코세이지 등 거물과 함께 일하는 특권을 누렸다. 우리는 사람들이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을 보고 즐길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도입했다. 그것은 영화를 보는 데 걸림돌이 되는 장애들을 걷어내고 우리 삶을 더욱 풍부하게 만드는 서비스 방식이었다. 

나는 종종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넷플릭스는 빠른 변화에 어떻게 적응했고 블로버스터는 왜 적응하지 못했을까? 우리가 댈러스로 갔던 그때만 해도 블록버스터는 좋은 패란 패는 다 들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브랜드가 있었고 힘과 자원은 물론, 비전도 있었다. 그래서 우리를 가볍게 내쳤다. 

당시에 나도 잘 몰랐지만 우리에게는 블록버스터에 없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 절차보다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능률보다 혁신을 강조하며, 통제를 최대한 자제하는 문화였다. ‘인재 밀도 talent density’를 기반으로 최고의 성과를 올리고, 통제가 아닌 맥락으로 직원들을 이끄는 데 초점을 맞추는 기업문화 덕분에, 우리는 지속적으로 성장하며 세상이 변하는 속도에 맞춰 같이 변화를 모색할 수 있었다. 그에 따라 우리 회원들의 요구 역시 우리와 함께 변신을 거듭했다. 

넷플릭스는 다르다. 우리의 문화는 규칙이 없는 것이 규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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