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상하이에서의 절망, 그리고 고뇌

이춘아 2021. 7. 4. 00:10

김명섭, [자유를 위해 투쟁한 아나키스트 이회영], 역사공간, 2008.


1919년 2월 베이징으로 재차 망명한 이회영은 그곳에서 동생 이시영과 이동녕을 다시 만났다. 당시 베이징에는 이들 외에도 조성호와 이광 등이 망명해 있었다. 그 당시에는 중국 각지에서 경쟁적으로 임시정부가 조직되는 등 3.1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의 기세가 불같이 타오르고 있었다. 

심지어 독립이 다 된 것처럼 생각하는 분위기까지 있었다. 이회영과 이시영 이동녕 조완구 이광 등이 상하이에 도착했을 때는 이런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상하이에는 이들뿐만 아니라 다른 독립운동가도 많이 모여들었다. 상하이에 모인 독립운동가들은 국내외에서 들불같이 일어난 만세운동에 한껏 고무되어 향후 독립운동을 어떻게 지도해 나갈 것인지를 두고 활발히 토론했다. 당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임시정부 수립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이회영은 임시정부 수립에 반대했다. 왜 이회영은 당시 모든 독립운동가들이 선호하고 주장하는 임시정부 수립에 반대하였을까. 3.1만세운동이 전국 각지와 해외 각지에서 들불처럼 퍼지고 곧 독립될 것처럼 모두가 흥분하며 다투어 새로운 정부와 지도부를 만들자고 하는 판에 왜 그는 홀로 이를 거부한다고 했을까. 

우선 이회영은 지난 6년 동안 국내에 잠입해 다양한 인사들과 젊은이들을 만나면서 국내의 인심, 특히 청년들의 정신에 뚜렷한 변화가 일고 있음을 보았고, 이것이 세계적인 추세라는 것을 이해하였다. 즉 과거와 달리 국내의 주요 인사들과 젊은이들은 이미 겉모습만 화려한 황제중심의 봉건왕조가 아니라 어렴풋하게나마 자유과 평등, 인권사상이 담긴 민주주의 체제를 갈망하고 있었으며, 특히 다수의 군중이 몇몇 지도자를 무조건 뒤따르는 일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고종황제가 붕어한 이 시점에서 어느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모이고 단결을 꾀한다는 것이 이제 불가능하며 무의미한 희생만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이미 지난 동학농민운동이나 의병항쟁을 통해 뼈저리게 겪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대다수의 국외 지도자들은 다년간의 망명생활 때문에 급변하는 국내 정세나 인심 동향을 모른 채 여전히 누구를 중심으로 뭉칠 것인가만 고민하고 있음을 이회영은 탄식했다. 심지어 동생 이시영이나 평생 동지인 이동녕조차도 어떤 인물을 중심으로 단체를 만들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어 그와 많은 격론을 벌였고, 결국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이회영은 이 문제가 장차 독립운동의 앞날에 나쁜 영향을 끼칠게 분명하므로 서둘러 해외 동지들과 만나 국내 실정을 얘기하고 의견을 나누고자 하였다. 

이회영의 당시 의견은 첫째, 군주시대가 이미 몰락하고 정세가 확연히 달라진 만큼 그에 걸맞은 새로운 운동 방향과 방법을 세워야 한다는것, 둘째, 우리가 지닌 온 힘을 합하여 하나로 단결된 항쟁을 해야 하는만큼 과거에서부터 내려온 지방색 또는 인물 중심의 대립을 일체 근절하여 통합의 방법을 강구하자는 것이었다. 

이처럼 이회영은 당시 3.1 독립만세운동으로 조성된 국내외의 독립운동 기운을 정부라는 행정적인 조직보다는 독립운동을 총괄하는 본부를 통해 지도하고 통합해 나가자는 주장을 펼쳤다. 그는 각 독립운동 조직이 서로 연락체계를 갖추어 실제 중복이나 마찰 없이 운동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자고 주장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조직 형태가 정부라는 행정적인 조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자유연합적 독립운동 지도부를 구성하자는 새로운 제안을 한 것이다. 이회영이 1919년 3월 하순 상하이에서 온 현순 목사와 함께 상하이로 출발해 초기 임시의정원에 가담한 것은 이런 방안을 계속 주장하기 위한 의도라 하겠다.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열린 대한민국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이회영은 동생 이시영과 함께 의원으로 참가한다. [조선혁명기]에 나오는 임시의정원 스물아홉 명의 대표 명단중 이회영은 김동삼 이시영 조소앙 김대지 등과 함께 동삼성(만주) 대표로 분류되어 있다. 이 회의에서 현순이 이회영을 국무총리로 추천했으나 부결되었다. 이날 격론 끝에 무기명투표에서 이승만이 당선되자 사태는 악화 일로를 겪게 되었다. 

임시의정원에서 임시정부 조직을 위한 헌법을 기초하자, 이회영은 다시 손정도 이동녕 조완구 조소앙 등에게 정부가 아닌 독립운동 총본부를 조직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정부를 조직하면 벌써부터 허영과 지배욕이 운동자들 사이에 넘쳐나는 상황에서 불필요한 개인 조직을 갖고 지위와 권력을 다투는 분규가 끊이지 않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회영이 임시정부 조직을 반대한 진짜 이유였다. 

그러나 1919년 4월 당시 상하이의 상황은 이회영의 우려가 적중했음을 보여줄 뿐이었다. 그는 상하이에 도착한 이후 각 방면의 지도자들을 만나 설득하려 했으나, 이미 예견했던 대로 그들 대부분은 국내의 변화된 상황과 새 조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오직 대한제국을 대신할 새 정부 수립에만 몰두해 있었다. 내분과 알력이 눈에 뻔히 보이는 상황이었지만, 그들은 정부를 조직해야만 독립운동이 대내외에 힘을 갖게 된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이회영의 진심을 오해한 일부 운동가들은 이회영이 구황제를 다시 추대하려는 보황파이기 때문에 정부 조직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냐고 비난하기도 했다. 나아가 혹 자신이 임시정부의 중요 인물이 되지 못한 까닭에 반대하는 것이 아닌지 오해하기까지 하였다. 

이미 상하이 임시정부를 조직, 발표한 지 보름도 안되어 서울에서 조직된 한성정부에서 상하이 임정을 취소하라는 일파가 나타나 대립이 생겨났다. 또 블라디보스토크와 간도 일대, 경상도 등의 대표들이 임정에 반대하고 합작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이회영은 이를 보고 참지 못하여 동생 이시영과 이동녕 등 임정 중심 인물들과 밤늦도록 격론을 벌이면서 때론 책상을 치며 분개하였으나, 그들의 몰이해에 분노를 느낄 따름이었다. 상하이에서 겪은 임시정부를 둘러싼 분노와 좌절 속에 이회영은 동생과 생이별한 채 그해 5월 베이징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임시정부는 전 독립운동가의 총의로 출발하지 못하고 이승만을 거부하는 세력과 맞서는 상태로 출범해야 했다. 그 이후로 임정에 실망한 독립운동가들은 상하이를 떠나기 시작했다. 임시의정원 의장인 이동녕, 재무총장 이시영, 외무총장 박용만을 비롯해서 신채호 조완구 이광 조성환 김규식 등이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특히 대통령으로 위촉된 이승만이 미국의 한 주로 편입되길 바란다는 외교청원론을 계획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적지 않은 반발이 일어났다. 

이회영은 박찬익을 따라 1923년 상하이로 간 이시영이나 이동녕 조완구와는 이후 평생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이때만 해도 이회영은 아나키즘(자유연합주의 또는 자유공동체주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때 이미 정부 형태보다는 각 조직이 자유롭게 협동 협력하여 연합전선을 펼 수 있는 운동본부 조직을 주장한 것은 그에게 선천적인 아나키스트의 기질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문화 책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0) 2021.07.11
어떻게 공기를 사고판단 말인가  (0) 2021.07.09
스스로 희망을 만들어간  (0) 2021.07.03
함께 쓰는 글은 힘이 세다  (0) 2021.06.27
삶이 흐르는 방향  (0) 2021.0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