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성시경의 ‘10월에 눈이 내리면’을 통해 처음 작사가로 이름을 올린 후, 어림잡아 5년은 더 직장생활을 겸했다. 한 곡을 발표했다고 해서 눈부신 작사가의 길이 열리지는 않았다. 게다가 처음에나 ‘신선함’으로 튈 수 있지,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프로 작사가들과 살벌한 경쟁을 치뤄야 한다. 일단 저작권료란 여러 곡이 쌓였을 때나 일반 직장인 초봉 정도의 수익이 될까 말까 하다. ‘10월에 눈이 내리면’으로 처음 들어왔던 저작권료가 6만 원 정도였던 기억이 난다. 그다음 달에 조금 더 많아져서 십몇만 원, 그리고 다시 몇만 원, 작사한 곡이 타이틀 곡으로 낙점되고, 타이틀 곡 중에서도 히트곡이 되어야 한 곡에 수익이 얼마가 났다더라, 하고 화제가 될 수 있는 수준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수록곡 중 하나라면 작사가의 ‘광고판’이 되어주지 못할 확률이 크다. ‘광고판’이라 함은, 업계 사람들이 ‘아, 저 곡을 저 사람이 썼네. 괜찮은데 한번 맡겨볼까’ 생각하는 곡이란 뜻이다. 나는 운좋게 데뷔를 했지만, 그후 셀 수 없이 많은 가사를 거절당했다. 소위 업계 말로 ‘까였다’.
고백하자면, 한 곡을 발표하고 난 후 수많은 가사가 탈락되는 과정에서 나는 ‘내가 이름발이 없어서 이런 거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 지나보니 잔뜩 힘만 들어갔을 뿐 특별한 표현도 없고 이렇다 할 결론도 없던 게 내 가사였다. 까일 만했다. 반복된 감정의 하소연만 있고, 기승전결이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매번 그 바보 같은 생각을 하고 또 했다. 왜 작곡가들이 내 가사를 몰라보지, 발표된 걸 봐도 내 가사가 더 좋은 것 같은데, 서럽구먼.
그러다 어느 순간 눈이 트였다. 선배 작사가들의 가사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전에야 그냥 ‘좋다’는 정도였다면, 디테일에서 어디가 프로페셔널한지 감지되기 시작했다. 발음을 다루는 법, 포인트를 주는 법, 서사를 끌어가는 법, 리듬을 살리는 법 … 그 눈이 트이면서부터 진짜 작사라는 걸 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일시적으로 침체기가 왔다. 나는 제대로 된 작사가가 되지 못할 것 같았으니까, 첫 곡은 운이 좋아 발표된 것뿐이고, 그 이상의 무언가를 쓸 수 없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작사를 하다보면 제일 많이 듣는 말이 “야마 있게 써주세요”라는 말이다. (그렇다. 작사가는 언뜻 보기엔 시적인 느낌의 직업이지만 작업 중 통용되는 단어들은 상당히 저렴한 표현이 많음을 고백한다. 까였다든가, 야마있다든가.) ‘야마’란 일본식 표현으로 알고 있는데, ‘딱 꽂히게 써달라’ 혹은 ‘잘 팔리게 써달라’는 정도의 뜻이다. 이 ‘야마’란 것이 참 개인적이면서도 절대적이어서, 분명히 내가 볼 땐 있는 것 같은데 남이 볼 땐 숭늉처럼 싱거운 가사인 경우가 많다. 나에게 이 ‘야마 있다’는 표현을 처음 피부로 느끼게 한 곡은, 당시 작곡가들이 입을 모아 칭송했던 김종국의 ‘한 남자’(조은희 작사)다.
한 남자가 있어,
널 너무 사랑한
한 남자가 있어,
사랑해 말도 못하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억할 이 가사는, 멜로디의 매력을 백 프로 살림과 동시에 후렴구의 제1덕목인 ‘야마 있는 ‘ 표현을 갖춘 글이다. 적절한 도치법으로 다음 가사에 대한 집중력을 높이고, 화자의 입장을 간결하게 설명함과 동시에 누가 봐도 공감할 수 있는 짝사랑의 심경을 그렸다.
같은 멜로디를 떠올리며 다음 가사를 붙여서 불러보자.
그대는 몰라도
난 그댈 사랑해
가슴이 아파도
그녀를 기다리기만
위의 예는 극단적으로 ‘야마 없는’ 가사다. 멜로디와 함께 문장이 끊어지지 않아 음의 매력을 죽이고, 너무나 평범한 글이라 감정을 살리지도 못한다.
매력적이면서도 작사의 교본이 될 수 있는 또다른 가사를 소개한다.
사랑한다는 그 말,
아껴둘 걸 그랬죠
이젠 어떻게 내 맘,
표현해야 하나
성시경의 ‘내게 오는 길’(양재선 작사) 후렴구다. 난 아직도 사랑의 마음이 깊어진 상태의 심경을 저만큼 정확하게, 그러면서도 범대중적 기준으로 모두에게 가닿을 수 있도록 표현해낸 가사를 본 적이 없다. 군더더기 없이 동의를 얻어내면서,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나는 감정을 짧고 굵게 표현했다. 멜로디를 살리는 역할은 기본 옵션이다.
눈이 트이고 난 뒤 보이는 가사는 일반 대중일 때 보던 가사와는 전혀 다른 세계의 글이다. 작사가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명심하라. 마치 외국어처럼, 어느 순간 귀가 트여 낯선 말들이 들어오듯 음악으로서의 글자가 보이는 때가 있다. 그러니 많이 듣고 분석하라. 내 맘에 드는 가사만 놓고 보지 말고, 히트를 친데다 롱런하는 곡이 있다면 왜 그 가사가 좋은 건지, 왜 그 가사를 작곡가나 제작자가 선택한 건지 파고들어라. 이것만 미리 훈련해놓아도, 당신에게 온 기회를 단숨에 잡을 확률이 아주 높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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