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희순, ‘김호연재의 삶과 문학’
김호연재(1681~1722)는 당당한 명문가의 훈손으로 태어나 지적 자부심이 대단했던 사람이었는데, 혼인 이후 모든 문학적 재주와 기개를 접고 나약한 한 여성으로 숨죽여 살아가야 하는 모습에 고뇌하였다. 먼저 그녀의 시 한 수를 보자.
<슬퍼서>
아까워라, 이내 마음
탕탕한 군자의 마음
겉과 속 숨김없으니
밝은 달이 흉금을 비추도다
맑고 맑음은 흐르는 물과 같고
깨끗하고 깨끗함은 흰 구름 같아라
화려한 사물 즐겨하지 않고
뜻은 구름과 물의 자취에 있도다
속된 무리와 하나 되지 못하니
세상 사람들 도리어 그르다 하네
규방 여인의 몸 됨에 마음 상한 것
창천은 가히 알지 못하리라
아, 할 수 있는 일 그 무엇이랴!
다만 각각의 뜻 지킬 뿐이지.
김호연재는 여성으로 태어난 것을 안타까워하였다. 넓고 광대한 군자의 기상을 지닌 호연재. 그러나 자신의 역량이나 욕망을 펼칠 사회적 여건이 아니었던 시대 상황 속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밝은 달처럼, 맑고 맑은 물처럼, 깨끗한 흰 구름처럼 그녀의 정신세계는 높고 고결하였다. 화려하게 몸치장하고 남성의 사랑이나 기다리는 성정이 아니었기에 여성으로 태어난 것을 더욱 슬퍼하였을 것이다. 그녀의 영혼은 속된 세상들과 섞일 수 없었으므로 언제나 외톨이었다. 김호연재는 당당한 군자의 마음을 지니고도 다 펼칠 수 없었던 자기 자신의 운명 앞에 통곡하였다.
<걸미삼산수>
호연당 위의 호연한 기상
사립문 위의 구름과 물, 호연함을 즐기네
호연이 비록 즐거우나 곡식에서 나오는 법
삼산군수에게 쌀 빌리니 이 또한 호연한 일일세.
쌀을 빌리면서도 이처럼 당당하고 의연하다. 김호연재는 ‘가난은 선비의 떳떳한 도이다. 사람을 대할 때 덕이 없는 것이 부끄러움이지 의식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라고 역설하였다. 안빈낙도 안빈호학을 실천한 조선시대 선비의 모습 그대로이다. 요즘음 우리네 삶에 비추어 볼 때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그녀의 배짱이, 풍요로운 정신세계가 아름답다. 시에 등장하는 삼산은 충북 보은의 옛 지명이다.
<취작>
취하고 나니 천지가 넓고
마음을 여니 만사가 편안하구나
고요히 자리 위에 누웠노라니
즐거움에 잠시 세상의 정 잊노라
<만음>
녹수는 콸콸 울타리 밖에 흐르고
청산은 은은히 난간 앞에 펼쳐있네
공명은 다만 인간사 한바탕 꿈일 뿐
무엇을 구구하게 세상과 다투리오
김호연재는 29세 즈음에 자신의 삶과 가치관을 토대로 스스로를 경계한 [자경편] 6장, 곧 ‘정심장’ ‘부부장’ ‘효친장’ ‘자수장’ ‘신언장’ ‘계투장’을 지었다. 이 [자경편] 6장은 자신의 수양과 실천 궁행을 위해 지은 것이며, 그 기저에는 거의 부부관계로부터 파생되는 일로 이루어져 있다. [자경편]은 김호연재의 심성론과 수양론을 기록한 철학적 사유의 응축이다. [자경편]은 한문본과 한글본, 다시 한문본으로 번역 유통되면서 송씨 집안 여성과 남성들의 모범적 독서물이 되었다. 후손 남성과 여성 모두가 읽었다.
김호연재는 마흔둘이라는 젊은 나이에 어린 두 자녀를 남겨둔 채 불꽃같은 삶을 마감했다. 홍성에서 태어나 열아홉에 동춘당 송준길 증손자 송요화(1682~1764)와 혼인하여 스물세 해를 대전의 여성으로 살다 갔다. 1714년부터 김호연재 부부가 살았던 고택은, 지난 2016년 8월 동춘당 종택(제289호)과 함께 국가지정문화재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명칭은 ‘대전 소대헌 호연재 고택’(제290호)이다. 그간 김호연재의 9세손 송용억의 이름을 따서 ‘송용억 가옥’으로 불리다가, 김호연재 부부의 이름으로 국가지정문화재가 된 것은 문학하는 이들에게도 큰 의미가 있다. 고택의 안채는 우리나라 여성문학을 대표하는 김호연재의 문학 창작 산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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