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돌담과 주변에 흩어진 돌덩어리들을 보자마자, 나는 내 책을 보관할 도서관을 지어야 할 곳이 바로 이곳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내 머릿속에는 어떤 도서관이어야 한다는 분명한 그림이 있었다. 그곳을 가기 얼마 전에 방문한 영국 켄트 시싱허스트에 있는 빅토리아 색빌웨스트의 집에서 보았던 긴 복도식 도서관과, 내 모교인 부에노스아이레스 공립 고등학교의 도서관을 적절하게 뒤섞은 모습이었다. 나는 어두운 색의 목재가 벽에 붙어 있고, 은은한 햇살이 스며드는 도서관을 갖고 싶었다. 안락의자들을 곳곳에 놓아두고, 바로 옆에는 조그만 공간을 두어 책상을 놓고 참고용 도서들을 정리해두고 싶었다. 서가는 내 허리춤에서 시작해서, 팔을 쭉 뻗어 손가락 끝이 닿은 데까지만 높일 생각이었다. 내 경험상, 사다리가 필요할 정도로 높이 올려진 책이나, 바닥에 배를 바싹 대야 할 정도로 아래에 꽂힌 책들은 주제나 가치에 상관없이 중간쯤에 정리된 책보다 눈길이 덜 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내 생각처럼 책들을 이상적으로 정리하려면, 흔적도 없이 무너진 헛간보다 서너 배는 더 큰 공간이 필요했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 “이것이 예술의 아픔이다. 눈에는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감각의 어리석음이 끊임없이 끼어든다"라고 한탄했던 푸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내 도서관의 서가들도 굽도리 바로 위에서 시작해, 천장을 가로지르는 들보에서 20센티미터즘 아래까지 올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도서관을 짓는 와중에, 벽돌공들이 돌담에서 아주 오래전에 벽돌로 막은 창문 둘을 찾아냈다. 하나는 성벽의 좁은 총안으로, 화난 농부들이 폭동을 일으켰을 때 그곳에서 궁수들이 트리스탕 레르미트의 아들을 지켜주지 않았을까 싶었다. 다른 하나는 나지막한 장방형 창문으로, 거칠게 깎은 중세 시대의 쇠막대들이 걸쳐져 있었다. 낮이면 나는 이 두 창문을 통해, 이웃집 닭들이 곳곳에 흩어진 먹이를 찾아 닭장을 소란스레 오가며 이곳저곳 쪼아대는 모습을 지켜보곤 한다.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아 헤매고 다니는 학자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새로 세운 담에 마련한 반대편의 창문으로는 사제관과 정원의 회화나무 두 그루가 훤히 보인다. 그러나 어둠이 내리고 도서관에 불을 밝히면, 바깥세상은 사라지고 책들만 잔뜩 쌓인 이 공간 이외에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바깥의 정원에 서 있는 사람에게, 밤의 도서관은 거대한 배처럼 보인다. 어둠 속에서도 조명이 밝혀진 창문과 반짝이는 책들로 에워싸인 도서관은 닫힌 공간이다. 일정한 형태가 없이 저 너머에 존재하는 우주의 자족적 규칙을 대신하는 곳, 혹은 이를 다르게 바꿔 놓은 것이라 주장하는 규칙들로 채워진 세계이기도 하다.
낮 동안에 도서관은 질서의 세계이다. 나는 분명한 목적하에 문자로 쓰인 글들을 읽어가며 이름이나 목소리를 찾고, 주제에 따라 내 관심에 맞는 책을 찾아낸다. 도서관의 구조는 난해하지 않다. 직선들로 이루어진 미로이지만, 방향을 잃게 하기 위한 미로가 아니라 원하는 걸 쉽게 찾기 위한 미로이다. 누가 봐도 논리적인 분류법을 따라 분할된 공간이며, 알파벳과 숫자를 이용해 기억하기 쉽게 맞추어진 분류 체계와 미리 결정된 목록에 따라 배치된 공간이다.
그러나 밤이 되면 분위기가 바뀐다. 소리는 줄어들고, 생각의 아우성은 더 높아간다. 발터 베냐민이 헤겔을 인용해서 말했듯이 “어둑한 밤이 되어야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날개를 편다”지 않는가. 시간이 깨어 있는 상태와 잠든 상태의 중간쯤에 가까워지면, 나는 편안하게 세상을 다시 상상할 수 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도둑처럼 움직이게 되고, 내 움직임은 비밀스럽게 느껴진다. 어느덧 나는 유령 같은 존재로 변한다. 책들이 바야흐로 진정한 존재를 드러내고, 독자인 나는 희미하게 보이는 문자들의 신비로운 의식을 통해 어떤 책이나 어떤 페이지에 유혹을 받아 끌려들어간다.
늦은 시간에는 일상의 제약이 무시되는 법! 따라서 밤이면 내 눈과 손은 일상적인 제약에서 벗어나, 깔끔한 선반에서 두서없이 움직이며 무질서를 회복한다. 어떤 책을 보다가 갑자기 다른 책을 떠올리며, 다른 문화와 다른 세계를 잇는 관련성을 찾아낸다. 낮에는 명확하지 않은 이유로 절반만 기억나던 구절이, 역시 절반만 기억나는 다른 구절에 의해 되살아난다. 아침의 도서관이 세상의 질서를 엄격하게 지키고 이를 또한 당연히 바라는 공간이라면, 밤의 도서관은 세상의 본질로 흥미진진한 혼란을 즐기는듯하다.
내 책들은 앞뒤 표지 사이에, 내가 이미 읽고 아직까지 기억하는 이야기, 지금은 잊어버린 이야기, 혹은 언젠가 내가 읽을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내 책들은 오래된 목소리와 새로운 목소리로 내 주변의 공간을 가득 채운다. 책에 담긴 이야기들은 낮에는 모든 페이지에 골고루 존재한다. 그러나 밤에는 온갖 상상과 감추던 꿈이 드러나기 때문에, 해가 서쪽으로 가라앉은 후에는 그 모든 이야기가 훨씬 생동감 있게 다가온다.
하지만 밤의 도서관이 모든 애서가에게 사랑받았던 건 아니다. 예컨대 미셸 드 몽테뉴는 나와는 달리 어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도서관은 탑 건물의 3층에 있었다. 과거에 창고로 사용하던 곳이었다. 그는 “나는 내 삶의 대부분, 낮 시간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다. 하지만 밤에는 그곳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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