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이는 좋은 아이가 참 드물다’
가칭 ‘독수리 부대’이며, 옷차림이 똑똑치 못한 이 가난한 꼬마들과의 가느다란 인연은 이렇게 봄철의 잔디밭에서 진달래 맑은 향기 속에 이루어졌다. 이 짧은 한나절의 사귐을 나는 나대로 자그마한 성실을 가지고 이룩한 것이었다. 나와 동행하였던 문학회 학생들은 아마 그날의 내 행위를 한낱 ‘장난’으로 가볍게 보았을 것이 사실이며 또 나의 그러한 일련의 행위 속에 어느 정도의 장난기가 섞여 있었던 것이, 싫기는 하지만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나와 헤어질 때의 일…, 진달래 한 묶음을 수줍은듯 머뭇거리면서 건네주던 그 작은 손, 그리고 일제히 머리 숙여 인사를 하는 그 작은 어깨와 머리 앞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선생님’이 아닐 수 없었으며, 선생으로서의 ‘진실’을 외면할 수는 도저히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그날의 내 행위가 결코 ‘장난’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상당히 무구한 감명을 받고 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곧 그들을 잊고 말았다. 그들을 까맣게 잊고 말았다는 사실, 그것이 그날의 나의 모든 행위가 실상은 한갓 ‘장난’에 불과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서오릉 봄소풍날로부터 약 15일이 지난 어느날, 숙명여대 교수실에서 강의 시작 시간을 기다리고 앉아 있는 나에게 정외과의 조교가 세 통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편지를 건네주면서 "참 재미있는 편지 같아요”라는 웃음 섞인 말을 던지더니 내가 편지를 개봉하면 어깨너머로라도 좀 보고자 하는 양으로 떠나지 않는다. 그 조교가 “참 재미있는 편지” 같다고 한 이유는 겉봉에 쓴 글씨가 무척 서툴러서 시골 국민학교의 어느 어린이로부터 온 듯할 뿐 아니라, 또 잉크로 점잖게 쓰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는 점에 있었을 것이다.
조대식, 이덕원, 손용대 세 녀석이 보낸 편지였다. 이 녀석들이 바로 ‘독수리 부대’ 용사들이라는 것은 겉봉에 적힌 ‘문화동 산 17번지’를 읽고 난 뒤에야 알 수 있었다.
“꼬마 친구들에게서 온 편지”라는 짤막한 말로써 그 편지를 전해준 조교의 질문과 호기심에 못을 박아버린 까닭은 내가 그 편지로 말미암아 무척 당황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편지는 분명히 일침의 충격이며 신랄한 질책이 아닐 수 없었다. 나보다도 훨씬 더 성실하게 그날의 일들을 기억하고, 또 간직하고 있었구나 하는 나의 뉘우침, 그 뉘우침은 상당히 부끄러운 것이었다.
편지는 세 통이 모두 똑같은 내용을, 똑같은 잉크와 펜으로 쓴 것이었는데 아마 한 자리에서 서로 의논하여 손용대는 이덕원의 것을, 이덕원은 조대식의 것을, 조대식은 또 손용대의 것을 서로 넘겨다보며 쓴 것이 틀림없었다. 선생님을 사귀게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는 것, 자기들 단체의 이름을 지었으면 알려달라는 것, 그때 찍은 사진이 나왔느냐는 것, 그리고 건강하시기를 두 손 모아 빈다는 것 등이 적혀 있었다.
그 소풍 이후 약 보름 가량을 나는 그들을 결과적으로 농락해오고 있었으며, 그날의 내 행위 그것마저도 결국 어린이들에 대한 무심한 ‘장난질’이 되어버린 듯한 느낌이 왈칵 나의 가슴 한 모서리에 엉키어 왔다.
나는 강의가 끝나는 대로 즉시 서울대학교로 달려갔다. 그때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던 학생(송승호 아니면 이해익으로 기억된다)을 찾았다. 필름이 광선에 노출되어 못쓰게 되어버렸단다. 사진이라도 가지면 나는 나의 무성의한 소행을 조금이나마 만회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 사실이다. 이제는 솔직히 그들에게 사과하는 길밖에 없다.
엽서를 띄웠다.
“이번 토요일 오후 다섯 시, 장충체육관 앞에서 만나자.”
토요일 오후 다섯 시, 장충체육관 앞의 넓은 광장에서 우리 일곱 명은 옛 친구처럼 반가이 만났다. 그러나 이미 한 시간 전부터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이 녀석들의 ‘정성’ 앞에서 나는 또 한번 민망스럽고 초라할 수밖에 없었다. 한 시간이나 먼저 와 있었다는 사실이 무모한 시간의 낭비라고 생각되기는커녕 그들의 진솔함이 동상처럼 높이 올려다보이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우리는 매월 마지막 토요일 오후 6시에 장충체육관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이 약속은 1968년 7월 내가 구속되기까지 매우 충실하게 이행된 셈이다.
두번째인가 세번째 모임에서 우리는 상당히 건설적인 합의를 보았다. 문화동 입구의 작은 호떡집에서 ‘문화빵’(10원에 3개)을 앞에 놓고 매달 10원씩의 저금을 하자는 약속을 한 것이었다. 6명이 10원씩을 모으면, 60원, 거기다 내가 40원을 더하여 매달 100원씩의 우편저금을 하기로 하였다. 수금과 예금 및 통장의 보관은 이규한 군이 책임지기로 하였다.
한 달에 100원씩이라 하더라도 1년이면 1,200원, 10년이면 12,000원이다. 우리는 그때 10년까지 계산해보았다고 기억된다. 그날은 공책을 한 권 사서 그것을 우리의 회의록 겸 장부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특기해야 할 사실은 매월 저금하는 10원은 반드시 자기 손으로 번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결의하였다는 점이다. 이렇게 하여 쌓인 우리의 저금은 내가 구속되던 1968년 7월까지 2,300원이 되리라고 기억된다.
1966년 9월 우리 ‘청구회’(꼬마들이 다니던 국민학교 교명) 회원 중 2명이 교체되지 않을 수 없었다. 집이 이사를 간 것이다. 한 사람은 청량리로, 또 한 사람은 용산 어디인가로 이사를 갔다. 비록 이사는 하였지만 모임이 있는 날에는 장충체육관 앞에 나오겠다고 다짐을 두고 떠나갔는데 두 번 거푸 결석(?)을 하였다.
우리는 2명의 결원을 충원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런데도 10월의 모임 때 여전히 충원되지 않고 4명만 모였다. “요사이는 좋은 아이가 참 드물다”는 것이 그들의 이유였다. 다음 달까지는 꼭 ‘좋은 아이’를 구하여 충원하기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