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청구회의 추억

이춘아 2022. 1. 22. 05:36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돌베개, 1998(개정판).

청구회의 추억

처음에는 서오릉 근처의 시골 아이들이 제 집으로 돌아가거니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다. 그러나 시간이 오전 아홉 시. 제가끔 제 집들에 있을 시간이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그리고 그중의 한 녀석이 들고 있는 보자기 속에 냄비의 손잡이가 보였다. 이 여섯 명의 꼬마들도 분명히 우리 일행처럼 서오릉으로 봄소풍을 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꼬마들의 무리에 끼어 오늘 하루를 지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가 속해 있던 문학회원들의 무리에서 이 꼬마들의 곁으로 걸음을 빨리 하였다. 

나는 어린이들의 세계에 들어가는 방법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중요한 것은 ‘첫 대화’를 무사히 마치는 일이다. 대화를 주고받았다는 사실은 서로의 거리를 때에 따라서는 몇 년씩이나 당겨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꼬마들에게 던지는 첫마디는 반드시 대답을 구하는, 그리고 대답이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만일 “얘, 너 이름이 뭐냐?”라는 첫마디를 던진다면 그들로서는 우선 대답해줄 필요를 느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놀림의 대상이 되었다는 불쾌감으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뱅글뱅글 돌아가기만 할 뿐 결코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반드시 대답을 필요로 하는 질문을, 그리고 어린이들이 가장 예민하게 알아차리는 놀림의 느낌이 전혀 없는 질문을 궁리하여 말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이미 그들은 내가 그들 쪽으로 옮겨오고 있음을 알고 제법 긴장들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의 걸음걸이가 조금 빨라지고 자주 나를 돌아다보는 것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예상을 뒤엎고 그들을 앞질러버릴 때까지 말을 건네지 않고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저쪽 산기슭의 양지에는 벌써 진달래가 피어 있었다. 나는 문득 생각난듯이 꼬마들 쪽으로 돌아서며 “이 길이 서오릉 가는 길이 틀림없지?” 하고 그 첫마디를 던졌다. 이 물음은 그들에게는 전혀 부담이 없는 질문이다. ‘예’ 또는 ‘아니오’로써 충분한 것이며, 또 그들로 하여금 자선의 기회와 긍지도 아울러 제공해주는 질문이었다. 

그들의 대답은 훨씬 친절한 것으로 나타났다. “네, 맞아요!”가 아니라 “네, 일루 곧장 가면 서오릉이에요”였다. 뿐이랴. “우리도 서오릉엘 가는 길이어요!” 반응은 예상보다 훨씬 좋은 것이었다. 

허술한 재건복 차림을 한 나에게 그처럼 친절한 반응을 보여준 것은 아마 조금 전까지 나와 같이 함께 이야기 나누며 걷던 문학회 회원들의 말쑥하고 반반한 생김생김의 덕분이었으리라고 느껴졌다. 

여하튼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는 사실, 이 사실은 그 다음의 대화를 용이하게 해주게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의 대화가 그 다음 대목에서 뜻밖에 경화되어버릴 위험은 여전히 도사리고 있었다. 그래서, “버스 종점에서 반쯤 온 셈인가?”  “아니요, 반두 채 못 왔어요.”  “너희들은 서오릉 근처에 살고 있는 모양이구나.”  “아니요. 문화동에 살아요.”  “그럼 지금 문화동에서 여기까지 오는 길이야?”  “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리믄 어쩔려구.”   “호호, 문제 없어요.”

이렇게 하여 일단 대화의 입구를 열어놓았다. 
이제 더 깊숙히 이 꼬마들의 세계 속으로 발을 들여놓아야 한다. 

신영균이와 독고성, 장영철과 김일의 프로레슬링, 손기정 선수 등의 이야기, 세종대왕, 을지문덕, 이순신 장군에 관하여 때로는 쉽게, 때로는 제법 어렵게 질문하면서 또 그들의 이야기를 성의 있게 들어주면서 걷는 동안 우리는 상당히 친숙해질 수 있었다. 

그들은 문화동 산기슭의 한 동네에서 살고 있다는 것, 오래전부터 자기들끼리 놀러가기로 약속해왔다는 것, 그래서 벼르고 별러서 각자 왕복 버스 회수권 2장과 일금 10원씩 준비하고 점심밥 해먹을 쌀과 찬(단무지뿐이었음)을 여기 보자기에 싸가지고 간다는 것, 자기들 여섯 명은 무척 친한 사이라는 것 등을 알게 되었다. 

너희들 여섯 명의 꼬마단체에다 이름을 지어 붙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고 제안하였더니, 이미 자기들도 그러한 이름 같은 것을 구상해두고 있는데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는것이다. 구상 중인 이름으로는 ‘독수리’와 ‘맹호부대’의 둘이 있다는 대답이다. 독수리나 맹호부대보다 훨씬 그럴 듯한 이름 하나를 지어주겠는가를 나한테 물어왔다. 나는 쾌히 이를 수락하였다. 

나와 이 가칭 독수리 용사들과의 첫번 대화는 대체로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어느덧 서오릉에 닿았고 이제 이 꼬마들과 헤어져서 나는 학생들 틈으로 돌아왔다. 물론 이따가 한 번 더 만나기로 약속해 두었다. 

문학회원들과 함께 우리 일행은 널찍한 잔디밭에 자리를 잡고 둘러앉아서 점심을 먹으며 놀고 있었다. 학생 중의 한 명이 잔디밭이 씨름판에  안성맞춤이니 누구 한번 씨름내기를 해보자고 서두를 꺼내자 엉뚱하게도 내가 그 씨름의 상대로 지목되었다. 평소에 나한테 구박을 한 번씩은 받은 녀석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일제히 나를 지목하여 골려보려는 저의는 봄소풍에 썩 잘 어울리는 놀이이기도 하였다. 아마 나를 자꾸 귀찮게 끌어내려는 녀석이 권만식이었다고 기억이 되는데, 나는 그때 저쪽 능 옆에서 우리를, 특히 나를 지켜보고 있는 예의 그 여섯 꼬마들의 얼굴을 발견하였다. 이 꼬마들도 나의 곤경을 주시하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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