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금대암

이춘아 2022. 5. 22. 00:10

김종길, [지리산 암자 기행], 미래의 창, 2016.

금대암, 지리산 최고의 전망대

금대암은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가흥리 금대산에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다.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금대암복구기성회가 중건했다. 현재 건물로는 무량수전과 나한전, 선원 등이 있고, 유물로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된 삼층석탑을 비롯하여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68호인 동종과 제269호 신중탱화, 경상남도 기념물 제212호인 함양 금대암 전나무가 있다. 

금대암은 금대산 바로 아래 해발 800미터가 넘는 벼랑에 있다. 암자에 이르니 스님 홀로 텅 빈 마당을 휘적휘적 걷고 있다. 방금 입구에서 수십 명의 단체 손님이 지나가서인지 “혹시 일행이오?”하며 묻는 스님의 눈빛엔 언뜻 경계가 비쳤다. 같은 일행이 아니라고 했더니 스님은 순식간에 나한전으로 모습을 감췄다. 

스님마저 마당을 비우니 암자는 깊은 적막에 빠졌다. 적막을 깨뜨린 건 누구인가. 

일망무제. 금대암에 오르면 지리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금대암에 서면 왜 이곳이 최고의 지리산 전망대로 불리는지 단박에 알 수 있다. 금대암에서 지리산을 바라보노라면 활처럼 뻗은 지리 능선이 한 폭의 그림이다. 손을 뻗치면 잡힐 듯 장엄한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1,915미터인 천황봉을 위시하여 왼쪽으로 중봉과 하봉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제석봉, 장터목, 연하봉, 춧대봉, 세석평전, 영신봉, 칠선봉 등 1500미터가 넘는 거봉이 구름 위로 솟아 있다. 다시 이 거봉을 호위하듯 해발 1,000미터가 넘는 20여 개의 높은 봉우리와 80여 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가 서로 어우러져 한 편의 장엄한 파노라마를 이룬다. 이따금 봉우리마다 걸려 있는 구름은 감히 범접하지 못한 신령스러운 기운을 내뿜는다. 이 장관이 바로 ‘금대 지리’라 불리는 함양팔경이다. 

예로부터 금대암에서 보는 지리산 풍경은 최고로 꼽혔다. 그 중 1643년 8월 20일 에서 26일까지 지리산을 유람한 박자원의 [유두류산기]를 보면 그 감동이 오늘까지도 전해진다. 

8월25일 맑음. 가마를 타고 금대암에 들렀다. 안국사에서 5리 정도 떨어져 있었다. 지세가 외딴 곳에 있는데, 산의 한 면은 조금도 가려진 곳이 없이 마치 금강산이 한눈에 보이는 정양사의 남루와 같았다(현재 내금강면 장연리 금강산에 있는 정양사의 남루는 경내 있는 작은 누각이다. 하지만 이곳에 오르면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한꺼번에 구경할 수 있다.)
하룻밤 묵었던 제일봉인 천왕봉을 멀리서 바라보니 하늘에 기둥 하나 꽂혀 있고, 구름은 모였다 흩어졌다 하니 참으로 예사람이 ‘내일이면 인간 세상의 일 해를 따라갈 터이니, 홀홀히 하루 저녁 신선 세계 나그네 되리’라고 한 것과 같았다. 그래서 시를 지어 읊었다. “짚신을 신고 첩첩 산중 험한 길을 다 밟고서/다시 오랜 사찰 금대사를 향해 돌아왔네/ 제일봉인 천왕봉 정상 어제 자던 그곳에는 / 흰 구름과 푸른 안개에 보일락 말락 하는구나”

이곳에서 지리 능선이 한눈에 보이니 옛사람들도 지리산을 오를 때 금대암에서 등반 여정을 가늠해봤다. 지리산을 유람할 때 금대암이 일종의 베이스캠프였던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전진캠프’였다고 할 수 있겠다. 지금이야 차로 지리산 아래 마을 어느 곳이든 반나절 만에 이를 수 있고, 종주도 넉넉 잡아 3박4일이면 충분하지만 예전에는 마을까지 오는데 며칠이 걸리고 등반을 하면 보름에서 한 달이 넘게 걸리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대부분 산청 단성면에 있는 단속사지나 하동 쌍계사 등의 큰 사찰은 ‘베이스캠프’ 구실을 했고, 천왕봉 아래에 있던 향적사와 천불암 등의 작은 암자는 ‘어택캠프’, 금대암과 벽송사 등의 주요 암자는 지리산을 오르기 전 전진캠프 역할을 했던 것이다. 

비탈에 일군 텃밭에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전나무 한 그루. 이제 금대암의 상징이 되어버린 전나무의 나이는 500살이 넘었다. 높이가 40미터, 둘레가 2.9미터로 현재 우리나라 전나무 중에서 가장 크고 오래되었다. 찻길이 놓이기 전 옛 산길로 암자를 오르면 금대암의 입구였던 이곳에는 원래 두 그루의 전나무가 있었는데, 한 그루는 벼락을 맞아 명을 다했다. 지리 능선의 장엄한 풍경을 재는 긴 자처럼 전나무는 허공에 매달린 듯, 지리산에 기대어 있는 듯 하다. 조선 성종 때의 문인 뇌계 유호인(1445~1494)은 이곳 금대암을 둘러보고 “잘 있느냐 금대암아/ 송하문이 옛날 같구나/ 송풍에 맑은 꿈 깨어/ 문득 잠꼬대를 하는구나”하는 시를 썼다. 

멀리 서암정사와 벽송사가 보인다. 예부터 지리산에서 맑고 깨끗한 곳으로 금대암과 벽송암이 제일이라고 했는데, 금대암에서 보면 벽송암(벽송사)이 보인다. 서로 마주보는 곳에 있는 맑고 깨끗한 암자는 수행에 그만이다. 벽송사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수행처라면 금대암은 깨달은 후에 보림(깨달은 뒤에 더욱 갈고닦는 수행법)하기에 적격한 곳이 아닌가 싶다. 아직 깨닫기 전의 수행자는 맑고 포근한 곳이 수행하기에 좋고, 깨달은 이는 사방이 탁 트인 곳을 수행처로 삼아 큰 뜻을 품는다고 했다. 

나한전 옆 층계를 오르면 집채만 한 너럭바위가 공중에 솟아 있다. 하늘의 기운과 땅의 기운이 만나는 곳에 있는 바위에는 한낮의 햇볕이 태운 열기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좌선하는 ‘선불장’으로 이곳이 제일이겠다. 바위에 앉으니 사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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