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소설 읽기

이춘아 2022. 7. 7. 20:42

2022.7.7(목) 맑았다가 7시경 소나기 잠깐 왔다 그침

여름이면 끈적한 더위 아래 뒹굴거리며 소설을 읽는다. 여름방학 때면 소설을 읽고 하던 습관이 인이 박혔나보다. 아버지는 나에게 ‘저 애는 땀이 날까봐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셨다. 더운 습기에 가라앉아 소설 속으로 빠져드는 걸 좋아했던 것 같다. 소설 [지리산]을 읽고, 소설 [료마전]을 읽었다. 도서관 서가에서 소설[난설헌]이 있어 빌려왔다. 신영복 선생의 글에서 허난설헌을 보았다. 허균이 누이의 시를 중국에서 펴냈다고 했던 그 이상을 알지 못했었다. 그녀의 삶이 그토록 고달팠던가 하여 위키백과를 보았다. 27살에 요절 두 아이를 잃고. 한 사람의 생애를 그렇게 요약한다. 그 까지였다. 

소설을 읽고서야 그 절박했던 삶, 신영복 선생이 안타까워했던 그녀의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 시대 뛰어난 여성이 겪을 수 있는 수모는 다 겪었다. 시를 쓰는 것만이 위로였지만 그 또한 여의치 않은 삶이었다. 짧은 삶이 어찌도 이리 기구하고 절절했나 싶다. 최문희 작가는 이 책으로 제1회 혼불문학상을 받았다고 한다. 언제가 읽으리라 했던 [혼불]도 찾아 읽어야겠다. 

짐정리하면서 파일에 넣어두었던 이중한 선생님의 글을 읽는다. 마침 제목이 ‘소설의 죽음과 읽기의 죽음’이다. 1999년 글이다. 그 당시 프린트해두었던 것이다. 프린트종이가 23년을 묵었다. 선생님의 글을 타이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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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한의 문화시론] 
소설의 죽음과 읽기의 죽음


올해 노벨문학상은 독일작가 귄터 그라스에게 주어졌다. 한국에도 충분히 소개되어 있는 작가이므로 우선은 쓸데 없는 노벨상 책내기 경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 다행이다. 노벨상 수상자가 발표될 때마다 우리에게 다행인 것은 이런 일 뿐이다.

롤랑 바르트는 텍스트의 즐거움에서 두가지 타입의 책의 중요한 구분을 이야기 한다. 하나는 ‘즐거움의 책’. 만족시켜주고 채워주고 행복감을 허락하는 책. 문화로부터 나왔으나 문화와 반목하지 않고 안락한 독서를 가능하게 해주는 책. 그리고 또하나는 ‘희열의 책’. 이것은 상실감을 주는 책, 불안감을 주고 독자의 역사적 문화적 심리학적 인식과 지식을, 그리고 기호 가치관 추억의 지속성을 뒤죽박죽으로 만들며 언어와의 관계를 위기로 몰아넣는 책이다. 귄터 그라스 소설은 따질 것도 없이 후자의 책이다. 따라서 노벨상을 받았다고 소급해서 다시 한번씩 읽을 독자가 많을 것 같지는 않다. 읽기조차 힘든 책이므로 노벨상에 기댄 올해 출판 장사는 그래서 좀 허망해 질 것 같기도 한다. 

그렇잖아도 소설 읽기의 즐거움은 우리 사회에서도 거의 다 사라지고 있다. 문학적으로 ‘소설의 죽음’을 선언한 것은 무려 30년 전 미국의 비평가 레슬리 피들러이다. 그가 소설의 죽음을 말한 관점은 소설이 서로 배타적인 두 그룹의 독자를 먼저 염두에 두고 쓰여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즉 가르치고 분석하고 해석하는 학계와 비평계를 위해 쓰는지 아니면 극장의 매표소에서 영화와 함께 무더기로 파는 소설로서 할리우드행을 위해서 쓰든지 그 중 어느 하나를 목표하고 있다는 맹점을 지적한 것이다. 

이제보면 그의 견해도 소설에 있어서는 행복한 시대의 푸념인 것 같다. 지금은 현실적으로 독립된 예술장르로서의 소설과 그 소설의 시장은 거의 없어져가고 있다. 진지한 소설만이 아니라 대중문화에 심취하는 더 이상 가벼울 수 없고 더 이상 매력적일 수 없는 오직 시간보내기 애완용 소설마저 시들해져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아직 무엇인가 소설이라는 것을 읽고 있다는 것은 그가 사는 방법의 새로 배우기에 게을러서이기 때문이라는 인상마저 준다. 

그러나 이것이 세상의 변화라고 해서 우리의 소설마저 안 읽기가 그 추세의 한부분이라고 말해도 되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는데 우리의 문제가 있다. 서양소설이 소설의 위기를 말하는 것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영화로만 보고 ‘오즈의 마법사’는 뮤지컬코미디로만 인지하며 H.G. 웰스의 ‘타임머신’은 만화책으로만 알고 있다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롤랑 바르트의 ‘희열의 책’에서 그 희열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는데서 제기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 읽기의 ‘희열’ 자체를 습득하고 있지 못하다. 진지한 읽기를 하자고 하면 그것이 책 그 자체의 진지한 내용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읽는 태도가 정숙해야 한다는 것쯤으로 이해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래서 온갖 잡서들, 예컨대 대필 라이터가 쓴 50대 저명인사 인생부풀리기 수필책마저 대단한 진리로 엄숙하게 읽고 있다. 이 읽기 수준으로 귄터 그라스를 바로 읽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우리 시장에서는 영화 양철북도 실패했다. 영화로서도 진지해지면 보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의 죽음과 읽기의 죽음은 전혀 다른 테마이다. 노벨문학상을 한번 받아보자는 국가적 노력이 지속되고  있으나 소설 이전에 읽기능력의 시장이 먼저 있어야 이 목표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남아있는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