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1948년 가을의 일

이춘아 2022. 9. 23. 23:49


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창비, 2022.

(125~131쪽)
여순사건이 나고 한 열흘 뒤, 큰언니는 가을걷이가 끝나고 아침저녁으로 팔에 소름이 돋던 늦가을 어느 날이라고 했다. 수배 중이라 한동안 보이지 않던 아버지가 14연대를 끌고 보무도 당당하게 나타났다. 14연대는 반내골에서 일주일 남짓 머물렀다. 작은 동네가 난생처음 사람들로 북적북적, 큰언니 말로는 잔칫집 같았다고 한다. 작은 아버지와 큰언니를 비롯한 동네 아이들은 젊은 군인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홀린 듯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어느 날 새벽, 큰언니가 군인들 구경하러 달려갔더니 북적이던 며칠이 꿈이었던 듯 다 사라지고 없었다. 반내골이 서리 맞은 호박잎처럼 처연해진 것 같았다. 어쩐지 언니도 풀이 죽어 학교로 갔다. 두시간 수업을 마치고 났는데 큰 총을 든 군인들이 교실로 들이닥쳤다. “고상욱이 본 사람 손 들어!”

군인의 입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불린 순간 여덟살이었던 큰언니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린 나이였지만 언니는 직감적으로 고상욱이 작은삼촌이라는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혹 누가 쟈가 고상욱이 조칸디라, 이르기라도 할까봐 언니는 가슴 졸이며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런데 키가 작아 언니보다 두줄 앞에 앉아 있던 작은아버지가 번쩍 손을 들었다.

“고상욱이 우리 짝은성인디요! 짝은성이 문척멘당위원장잉마요.” 면당위원장은 면에서 제일 높은 사람, 작은아버지는 형이 자랑스러웠던 것이다.

“요씨! 고상욱이 언제 봤어?”

“동네서 돼야지를 시마리나 잡아가꼬 군인들허고 한대엿새 잔치를 치렀는디요. 오늘 새복에 눈 떠봉게 가불고 없든디요.”

옆자리였으면 옆구리라도 찔러가꼬 고놈의 주둥이를 꿰매불고 싶등만은 떨어진 자링게 그랄 수도 없고, 나는 속이 타들어가는디 막냉이삼춘은 속도 없이 미주알고주알 오만 것을 다 일러바치지 않겄냐, 막냉이삼춘이 본래부텀 입이 방정이었단 말이다. 큰언니는 1948년, 여덟살 가을의 일을 엊그제인 양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날, 군인들은 아홉살 작은아버지의 등에 총을 겨눈 채 마을로 내려갔다. 아버지가 미리 몸을 피하라 일러둔 덕에 당시 구장이었던 할아버지밖에 마을에 남아 있지 안았다. 할아버지는 아버지와 달리 한민당 지지자였다. 붉은 물이 든 아버지를 가장 못마땅하게 여긴 것도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산속으로 피신하라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도 피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당연히 말을 전했으니 피한 줄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왜 피하지 않았는지는 모른다. 평소 우파였으니 반란군 편으로 몰리지 않을 거라 확신했을 수도 있다. 돼지를 세마리나 잡아서 잔치를 했다고 작은아버지가 이르지만 않았더라면 할아버지의 확신대로 살 수 있었을까? 그날 들이닥친 건 구례 경찰이 아니라 외지 군인들이었다. 며칠 전 14연대에게 호되게 당한 그들이 할아버지가 우파인지 좌파인지 일말의 관심이나 있었을까 싶다. 물론 지난 일이고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은 군인들과 할아버지와 작은아버지뿐이었으니 이제 와 진실을 알 길은 없다.

군인들은 물러가기 전 집집마다 불을 놓았다. 유서 깊은 양반 가문의 한옥이든 상놈의 초가집이든 불은 훨훨 잘도 붙어 순식간에 반내골은 검붉은 화염에 휩싸였다. 집이 불타는 것을 보면서도 마을 사람들은 발만 동동 구를 뿐 불을 끄러 내려갈 수 없엇다. 군인들의 모습이 신작로에서 사라진 것을 확인한 뒤에야 사람들은 마을로 내려왔다. 연기에 휩싸인 마을 정자 옆, 할아버지의 주검 곁에서 오줌을 지린 채 혼절한 작은아버지를 발견한 것은 큰언니였다.

“그때게… 막냉이삼춘이 손만 번쩍 안 들었으면 할배가 안 죽었을랑가……” 큰언니가 옷고름으로 눈물을 찍으며 중얼거렸다. 그날, 반내골 사람들은 집이 되 불타 이불 한채, 옷 한벌도 건지지 못한 채 입고 있던 옷 그대로 뿔뿔이 흩어졌다.

“우리는 외가로 가고, 할매는 막냉이삼춘이랑 고모들을 데꼬 워디로 갔능가 모르제. 난리 끝나고 돌아와봉게 막냉이삼춘이 딴사램이 돼부렀드라고. 전에 삼춘 벨멩이 촉색였어야. 눈만 뜨면 나불나불, 암말이나 지껄여싸는 통에 저눔의 입이 방정이라고, 입 잘못 놀리다 필시 겡을 칠 거라고, 할배가 천날만날 쎄를 찼었는디, 꿀 묵은 벙어리맹키 입이 위알로 딱 붙어부렀드랑게. 나 시집 갈 때거정 삼춘 입 여는 것을 댓번이나 봤을랑가…… 자개도 그날 입 촐랑거린 것이 영 맘에 쓰였겄제이. 긍게 일초도 안 닫히던 입이 영 닫혀분 것이여. 난중에 장가들고 새끼 낳고는 도로 쪼까 열리긴 했제만……”

그런 사연이 있는지 몰랐다. 그저 빨갱이 아버지 때문에 집안 망하고 공부 못한 것이 한이라 사사건건 아버지를 원망하는 줄로만 알았다. 아홉살 작은아버지는 잘난 형 자랑을 했을뿐이다. 그 자랑이 자기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갈 줄 어찌 알았겠는가. 작은아버지는 평생 빨갱이 아버지가 아니라 자랑이었던 아홉살 시절의 형을 원망하고 있는 게 아닐까. 술에취하지 않으면 견뎌낼 수 없었던 작은아버지의 인생이, 오직 아버지에게만 향했던 그의 분노가, 처음으로 애처로웠다. “나도 그때게는 애기였는디 워째 그렁가 이날 입때껏 그날 일을 입도 뻥긋 못허겄드라. 생각해보믄 시상 잘못 만난 짝은아배도 짠허고, 막냉이삼춘도 짠허고…… 아매 막냉이삼춘은 시방도 그날 싱각을 하고 있는가 모르제. 그날, 두 헹제가 원수로 틀어졌응게……”

불타는 마을, 쨍한 가을 하늘을 온통 틀어막은 잿빛 연기, 그 연기 속에 오줌을 지리며 가무러친 아홉살의 작은아버지, 총을 세방이나 맞고 눈도 감지 못한 채 조상 대대로 시를 읊던정자 앞에 주검으로 누워 있던 할아버지, 큰언니의 이야기가 어찌나 생생했는지 나도 잠시 1949년의 가을 반내골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긍게 아가. 혹여 막냉이삼춘이 안 와도이, 너무 서운해 말그라. 자개 속은 속이겄냐? 필시 고주망태로 취해 있을 것이다.”

아버지는 알았을까? 자기보다 한참 어린 막내가 면당위원장인 당신을 그렇게나 자랑스러워했다는 걸, 그 자랑이 당신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갔다는 걸, 그게 평생의 한이 되어 자랑이었던 형을 원수로 삼았다는 걸, 어쩐지 아버지는 알고 있었을 것 같다. 그래서 아버지는 수시로 작은아버지의 악다구니를 들으면서도 돌부처처럼 묵묵히 우리 집이나 작은집 마루에 걸터앉아 담배만 뻐끔거렸을 것이다. 하지만 정확히는 몰랐을 수도 있다. 아무도 보지 않은 그날의 진실을, 그날 작은아버지 홀로 견뎠어야 할 공포와 죄책감을, 보지 않은 누군들 안다고 할 수 있으랴. 역시 작은아버지에게는 작은아버지만의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독한 소주에 취하지 않고는 한시도 견딜수 없었던 그러한 사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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