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화, [살아간다는 것](백원담 옮김), 푸른숲, 2005(1997 첫판)
(머리말)
진정한 작가는 영원히 자신의 속마음에 따라 글쓰기를 한다. 깊은 속마음이 있어야 비로소 진실하게 자기를 말할 수 있고, 그리 할 때 그의 사사로운 감정과 고상함이 어느 정도 돌출될 수 있다. 속마음은 작가로 하여금 진실로 자기를 이해하게 한다. 일단 자기를 이해하면 또한 세계를 이해한 것이다. 아주 오래 전부터 나는 이러한 원칙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을 고수하려면 반드시 어려운 노동과 장시간의 고통을 거쳐야 한다. 내심은 결코 순간순간마다 다 털어놓아지는 것이 아니며, 너무 가득 차 있으면 도리어 문을 닫아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글쓰기가 있을 뿐이다. 쉬지 않고 글을 쓰다 보면 비로소 자신의 속마음이 문을 열게 할 수 있고, 비로소 자기를 발현하게 하고, 동터오르는 빛이 어둠을 밝히듯 영감이 돌연 나타나는 것이다. 이미 오래부터 나의 작품은 모두 현실과의 긴장관계에서 나왔다. 나는 상상 속에 빠져 있었으며, 아울러 현실에 의해 단단히 압박을 받았고, 그 때문에 자아의 분열을 분명하게 감수하고 있었다. 나는 내 자신을 순수하게 만들 방법이 없었다. 나는 일찍이 순수하고 아름다운 동화작가가 되고 싶었다. 아니면 참된 작품의 옹호자가 되든지. 이 둘 중의 어떤 한 사람이 될 수 있다면 내 마음 깊은 곳의 고통이 앞으로 많이 가벼워지고 미약해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그와 동시에 나의 역량도 아주 많이 쇠잔해질 것이지만…. 사실상 나는 지금과 같은 작가가 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시종 가슴의 울림에 따라 글을 써나갈 뿐, 이지(理智), 그 어떤 냉철한 이지가 나의 글쓰기를 대체했던 적은 없었다. 바로 그런 이유로 나는 아주 오랜 세월, 분노에 차고 냉혹하기 이를 데 없는 작가로 존재하였다.
이것은 나만 직면한 곤란이 아니다. 거의 모든 우수한 작가라면 누구나 현실과의 긴장관계 속에 있으며, 그들의 붓끝에서 마침내 현실의 요원한 상태에 처하게 될 때 그들의 작품 속의 현실이 찬란히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지나가버린 현실은 매력이 충만하지만 거기에는 이미 한 풀의 거짓된 색채가 덮여있고, 그 이면에는 개인의 상상과 자기이해로 가득 막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진정한 현실은 역시 작가생활 속의 현실이며,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렵고 함께 지내기 어려운 현실이다.
작가는 아침저녁으로 대한 현실을 표현해내야 한다. 그는 늘상 그런 일은 정말 감당하기 힘들다고 여기며, 쇄도해오는 진실들이 왜 그처럼 하나같이 추악하고 음험하기 짝이 없는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한다. 왜 이상한 것이란 이상한 것은 모두 여기에 있고, 추악한 사물이란 사물은 다 자기 신변에 있는지, 그러나 아름다운 것은 왜 머나먼 바다의 끝에서 가물거리는지, 작가는 그러한 현실에 대해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생 동안 자아와 현실의 긴장관계를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작가도 있다. 포크너가 가장 성공한 예이다. 그는 하나의 온화한 화해의 길을 찾았다. 그는 극단적 상황이 아닌 중간상태의 사물을 묘사하면서 아름다운 것과 추악한 것을 포용했다. 그는 미국 남부의 현실을 역사와 인문정신 속에 내려놓았는데,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문학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과거와 미래를 잇고 있기 때문이다. 성공하지 못한 작가들도 현실을 묘사하기는 한다. 그러나 그들의 붓끝에서 현실은 폭로되고 까발려진다. 그러한 현실은 하나의 환경에 불과하며, 단단히 굳어버리고 죽어버린 현실일 뿐이다. 그들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어떻게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시시콜콜 따져대는 인물을 묘사했을 때, 우리들은 작가 자신 또한 지나치게 폭로주의에 빠져들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러한 작가가 쓴 작품은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묘사한 것일 뿐 현실적인 작품은 아니다. 앞에서 이미 말했듯이 나와 현실의 관계는 다소 엄중하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줄곧 적대적인 태도로 현실을 대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마음속의 분노가 점점 삭아들고 편안해지면서, 나는 진정한 작가가 찾고자 하는 것은 다름아닌 진실이라는 것을 의식하기 시작한다. 그 진리는 일종의 도덕적 판단을 배척하는 진리이다. 작가의 사명은 발설이 아니며, 고소 혹은 폭로가 아니다. 작가는 사람들에게 고상함을 드러내보여야 한다. 여기에서 말한 고상함이란 그저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니고 일체의 사물을 이해한 뒤의 초연, 선과 악에 대한 동일시이며 동정의 눈으로 세계를 대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심정 속에서 나는 미국 민가 ‘톰 아저씨’를 들었다. 노래 속의 그 늙은 흑인노예는 일생 동안 고난을 겪었고, 가족은 모두 그보다 먼저 가버렸다. 하지만 그는 의연한 태도로 세계를 우호적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원한서린 말 한마디 없다. 이 노래는 나의 심금을 울렸고. 나는 이러한 소설을 쓰기로 결정했다. 그것이 바로 이 [살아간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사람이 고난을 감수하는 능력과 세계에 대한 낙관적 태도를 써나갔다. 글쓰는 과정에서 나는 깨달았다. 사람은 살아가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나가고 있는 것이지, 살아가는 것 이외의 어떤 위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는 내 스스로 고상한 작품을 써나갔다고 생각한다.
(한국어판 머리말) 나는 이 작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다. 작가 자신이 자기 작품을 해석한다는 것은 매우 곤란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한번 시험해보고 싶다. 한국의 독자들은 이러한 나의 모험을 충분히 용인할 것이다. 이 작품의 제목은 [살아간다는 것(活着)이다. ‘살아간다는 것’이라는 말은 우리 중국말에서는 하나의 단어이며 힘이 넘치는 말이다. 그 힘은 절규에서 나오는 것도 박차고 나아가는 데서 생기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인내와 감수이다. 그것은 생명에 대한 감내를 우리의 책임으로 부여하며, 우리의 행복과 고난, 무료함과 일상의 현실을 감수하게 한다.
작품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개인과, 그의 운명과의 우정을 이야기한 것이다. 이것은 사람을 가장 감동시키는 우정이다. 그들은 서로 감격하면서 동시에 서로 원수진다. 사람과 그의 운명은 서로 상대방을 포기할 방법이 없고, 서로를 원망할 이유가 없다. 그들은 사랑하는 동안은 흙먼지 풀풀 날리는 길을 함께 가고 죽어갈 때는 빗물과 진흙 속에서 함께 나뒹군다.
아울러 [살아간다는 것]은 사람이 어떻게 거대한 고난을 감수해나가는가 하는 이야기이다. 힌 개의 머리카락이 4만 근의 무게를 감당해낸다. 중요한 것은 머리카락이 그러한 무게를 감당해낸다는 사살이다. 그것은 끊어지지 않는 것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눈물의 관용과 넉넉함을 실타래처럼 풀어나갔다고 믿는다. 그리고 절망이 존재하지 않음을 이야기하였다. 사람은 살아가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살아가는 것 이외의 그 어떠한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물론 [살아간다는 것]에는 우리 중국인들이 최근 몇십 년 동안 얼마나 어렵게 살아왔는가 하는 삶의 내력이 담겨져 있다. 그러나 나는 안다. [살아간다는 것]에서 풀어낸 이야기들이 이러한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문학은 이런 것이다. 그것은 작가가 의식한 것을 써낸 것이지만, 동시에 작가가 의식하지 못한 것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미묘한 틈새에 끼여들어 자기발언을 하는 것이 독자의 몫일 것이다.

'문화 책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상의 운율 (0) | 2022.12.07 |
---|---|
그러나 문학은 기적적이다 (1) | 2022.12.03 |
젊은 날에 무작정 떠난 지중해 여행 (1) | 2022.11.19 |
아Q에 관한 정전 (0) | 2022.11.18 |
관념의 씨앗 (1) | 2022.1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