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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 노동의 응축, 멸치액젓

김창일, [물 만난 해양민속학자의 물고기 인문학], human & books, 2024.(121~ 127쪽)밑반찬은 물론이고 젓갈, 액젓, 분말 등 감칠맛을 내는 데에 빠뜨릴 수 없는 식재료, 우리 식탁에서 멸치의 위상을 넘는 생선이 있을까? 조연처럼 보이지만 실은 맛의 주연이다. [자산어보]에서는 멸치를 추어, 멸어라 했다. ‘업신여길 멸’ 자에서 알 수 있듯 변변찮은 물고기로 여겼다. 국이나 젓갈 또는 말려서 각종 양념으로 썼다. 물고기 미끼로 사용했으며 선물용으로는 천한 물고기라고 했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한 그물로 만선하는데 어민이 멸치를 즉시 말리지 못하면 썩으무로 이를 거름으로 사용한다. 건멸치는 날마다 먹는 반찬으로 삼고 회, 구이로 먹고 건조하거나 기름을 짜기도 한다’고 했다. [난..

빛과 실

한강, , 한림원 노벨문학상 수상기념 강연, 2024.12.7. (다음은 한 작가의 강연 전문. 관련 내용과 영상은 2024.12.8 한경닷컴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빛과 실지난해 1월, 이사를 위해 창고를 정리하다 낡은 구두 상자 하나가 나왔다. 열어보니 유년 시절에 쓴 일기장 여남은 권이 담겨 있었다. 표지에 ‘시집’이라는 단어가 연필로 적힌 얇은 중철 제본을 발견한 것은 그 포개어진 일기장들 사이에서였다. A5 크기의 갱지 다섯 장을 절반으로 접고 스테이플러로 중철한 조그만 책자. 제목 아래에는 삐뚤빼뚤한 선 두 개가 나란히 그려져 있었다. 왼쪽에서부터 올라가는 여섯 단의 계단 모양 선 하나와, 오른쪽으로 내려가는 일곱 단의 계단 같은 선 하나. 그건 일종의 표지화였을까? 아니면 그저 낙서였을 ..

‘정정화 지사’

김선재 임재근 정성일, [대전현충원에 묻힌 이야기], 도서출판 문화의힘, 2024.(163~ 171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1묘역 313호에는 ‘한국의 잔 다르크’, ‘조자룡 같은 담력’으로 불렸던 정정화 지사가 잠들어 있습니다. 지사는 삼엄한 경비를 뚫고 여섯 차례나 식민지 조선땅에 들어와 독립운동자금을 모았습니다. 임시정부가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는 임정 어른들을 손수 모시며 살림을 책임지기도 했습니다. 1920년 1월 정정화 지사는 중대한 결심을 하는데요. 상해로 건너간 시아버지(김가진)와 남편(김의한)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기로 마음먹습니다. 뜻을 세운 지사는 친정아버지를 찾아가 결의를 밝힙니다. “아버님, 제가 상해에 가서 시아버님을 모시면 어떨까요?”“말처럼 쉬운 일이 아닐텐데 네가 해낼 수 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