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모토 테루, [생의 실루엣](이지수 옮김), 봄날의책, 2021.
(80~88쪽)
원인도 모르고 확실한 치료법도 없으며 나을 전망도 보이지 않는 병을 아내의 부모님께는 감춘 채 결혼한 나는, 그 뒤로도 하루에 몇 번이나 덮쳐오는 발작을 견디며 회사를 계속 다닐 수밖에 없었다. 상사도 동료도 그 시기의 내가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느꼈을 것이고, 몸이 안 좋냐고 물어보기도 했지만 병에 대해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았다.설명해봤자 어떻게도 이해받지 못할 테고, 당시 사회에서는 그것이 어떤 종류건 간에 정신적인 질환을 가진 사람에 대한 편견이 드세었기 때문이다.
증상은 갈수록 더욱 심각해졌다. 텔레비전 뉴스에 교통사고 현장이 나오거나 하면 심장이 울렁거리고 죽음이 내 코앞에 다가와 있는 듯한 생각에 사로잡힌다. 자살 뉴스 같은 건 텔레비전 화면은 고사하고 신문의 작은 기사에서도 눈을 돌리고 만다. 나도 같은 짓을 저지르는 게 아닐까 하는 공포를 느끼는 것이다. 그렇지만 죽음을 향한 충동은 한 번도 일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은 실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죽자, 하는 정신 상태에 빠지기 쉽다고 알려주었다. 그때 의사는 미야모토 씨는 어지간히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라고 덧붙였지만, 내가 죽음으로 향하지 않았던 것은 정신력 때문이 아니다. 나한테 꿈만 같은 큰 목표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나에게 터무니없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꿈은, 공황장애 때문에 이제는 어찌할 도리가 없이 스물일곱 살로 사느냐 죽느냐 하는, 일테면 무모한 내기를 거는 수밖에 없어진 한계점에서 찾아낸 단 한 줄기의 광명이었다. 어느 날 거래처에서 사전 미팅을 마치고 빌딩을 나왔더니 굵은 빗방울이 떨어져 내렸고, 우산이 없던 나는 근처 지하상가로 내려가 비를 피했다.빗줄기는 점차 거세어져 그칠 기미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서점으로 들어가 눈앞의 책장에 있던 잡지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의식적으로 고른 것은 아니다. 비를 긋는 시간을 때울 수 있다면 뭐든 좋았다. 그것은 순문학이라 불리는 소설을 싣는 유명한 문예지였다. 고등학생 때 두세 번 읽은 적은 있지만 따분해서 나와는 인연이 없는 것이 되어 있었다.그 일류 문예지의 권두를 장식한 단편소설은 대부분의 사람이 이름 정도는 아는 저명한 작가의 최신작이었다. 아마도 400자 원고지로 30~40장 짜리 작품이었을 것이다.
서점 통로에 선 채로 읽기를 끝마친 뒤, 나라면 이 글들보다 백배는 더 재밌는 소설을 하룻밤 만에 쓸 수 있겠다 생각하며 그 문예지를 책장에 되돌려놓았다. 그 순간 나는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소설가가 되면 전철을 타지 않아도 된다. 매일 집에서 일할 수 있다. 북적이는 곳을 걷지 않아도 된다. 이제 이것 말고는 내가 처자식을 먹여 살릴 길은 없다, 하고.
그때의 이야기를 하면 백이면 백 웃음을 터뜨리지만, 나는 거짓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고바야시 히데오는 [모차르트]에서 “생의 힘에는 외적 우연을 곧 내적 필연으로 바라보는 능력이 갖춰져 있는 법이다. 이 사상은 종교적이다. 그러나 공상적이지는 않다.” 라는 말을 남겼다. ‘느끼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것이다. 이 한 글자 차이가 가지는 의미는 깊고도 크다. 나는 곧바로 회사를 그만두고 소설 쓰기에만 매진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꺼림칙한 기침을 종종 했다. 저녁이 되면 미열이 나서 권태감으로 30분 가까이 누워있어먀만 하는 상태가 매일 이어졌다.이런 소설보다 백배는 재미있는 글을 하룻밤 만에 써 보이겠다고 생각했건만 일은 그리 간단히 흘러가지 않았다. 써도 써도 신인상 1차 예선도 통과하지 못한다. 집에 있어도 공황발작은 덮쳐온다. 실업급여도 앞으로 석 달이면 끝난다. 수입은 한 푼도 없다. 게다가 폐결핵에 걸렸을지도 모른다…….
왠지 지옥 밑바닥으로 떨어져가는 듯한 나날을 보내던 중, 내 안에서 내가 미치는 게 아닐까 하는 공포가 시작되었다. 이 공포는 말로 표현할 길이 없었다. 공황발작의 공포 같은 건 그나마 귀여운 수준이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에 더해 숨 쉬는 것조차 괴로울 정도의 권태감, 내가 생과 사에 대해 골똘히 생가하게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하나의 미세한 정자와 난자가 합체하는 것만으로, 어째서 생명이라는 불가사의한 것이 태어나는가. 그것은 무엇을 위함인가. 그리고 반드시 찾아오는 죽음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어느 것도 서른도 채 안 된 청년이 제 머리로 생각해서 알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 생각했다.두 어린 아들의 귀여움이 힘없이 드러누워 있는 나를 책상으로 이끌 때도 많았다(정말이지 어째서 이럴 때 연년생이 태어나버리는 걸까). 저쪽의 높은 봉우리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계곡의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가야만 한다고 말했던 사람이 있다. 그것은 사물의 이치다, 라고. 나는 그 계곡의 밑바닥에 있었던 거라고 생각한다. 완전히 절망적인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도 아내도 확신했기 때문이다. 반드시 작가를 향한 길이 열릴 거라고. 부부가 나란히 천하태평인 낙천가라고 비웃겠지만, 그 하나에 관해서만은 나도 아내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대체 무엇을 근거로 한 확신이었는지 지금 와서는 잘 모르겠다.
생과 사에 대한 나의 생각은 어느 시기에 ‘자연’과 ‘풍경’과 인간 그 자체의 진실한 아름다움을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살아가자, 멋진 소설을 쓰자, 하는 필사적인 일념이 내게 가져다준 최초의 보물이었다. 같은 때 나는 문학이 무엇인지 가르쳐주는 인물을 만나 하나부터 열까지 정성 어린 지도를 받게 되었다. 그 사람 덕분에 소설이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말로써 직조해나가는 것이라고 깨달을 수 있었다.그것은 나라는 인간의 안에서만 나오니까. 나라는 인간을 크게 만드는 수밖에 없다. 이 병은 그 때문에 내 내부에서 솟아난 것이다. 잘 쓰고 못 쓰고는 나중에 따라온다. 마음속에 있는 풍경과 자연과 인간이 하는 다양한 일을, 애정을 담아 소설로 쓰자. 나는 그리 결심하고 [반딧불 강]을 썼고, 다음으로 [흙탕물 강]을 썼다.
이 두 작품은 두 문학상을 연달아 받았지만, 수상 후의 중요한 단계가 될 [환상의 빛]을 쓴 다음에야 나는 병원에 갔다. 기침은 심해졌고 가끔 그 기침과 함께 피가 나오고 있었다. 엑스레이에 찍힌 나의 양쪽 폐 윗부분은 새하앴고 작은 동공이 세 개 있었다. 폐결핵이었다.“이렇게 될 때까지 병원에 잘도 안 왔네요.” 의사는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소설가가 되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하고 있어서 그럴 여유가 없었고, 혹여 입원이라도 할 경우 어쩌면 꿈을 포기해야 햘 수도 있었다. 그래서 병원에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말을 역시 의사에게는 할 수 없었다.
어머니와 아내와 두 아들에게 옮지 않았던 이유가 내 체내에서 결핵균이 안 나왔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나중에야 판명되었다. 그 또한 너무도 불가사의한 행운이었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반년 동안의 입원 생활과 3년 남짓한 자택 요양을 이어나가 이제 약은 안 먹어도 된다고 의사의 보증을 받은 것은 서른네 살 때다. 폐결핵은 나았지만 공황장애는 여전히 꼬리를 끌고 있었다. 그래도 발작이 일어났을 때 그것이 지나가게 두는 법을 조금씩 터득해가고 있었다. 이 정도라면 가끔 발작이 일어나도 괜찮겠거니 생각하기 시작한 바로 그때,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발작이 나를 덮쳤다. 미칠지도 모른다는 격렬한 공포도 함께 찾아와서 나는 결국 정신과 진료를 받기로 했다. [금수]라는 소설을 절반쯤 쓴 무렵이다. 스물다섯 살 때 발작이 덮여온 뒤 9년이 지나서야, 우울증도 아니고 강박관념증도 아니고 조현병도 아닌 전형적인 불안신경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미치지 않아요. 이 발작으로 죽은 사람은 한 명도 없어요. 천재는 대부분 이 병을 앓고 있답니다. 발작이 너무 심하면 이 약을 드세요. 금세 편해질 겁니다. 속이 거북하면 소화제를 먹죠? 그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정신과 의사는 온화한 미소로 말하며 신경안정제를 줬다. 천재 운운은 나를 격려하기 위한 말이었을 터다. 그 약이 나의 상비약이 된 지도 벌써 30년이다. 복용하는 일은 거의 없으니 말하자면 부적 같은 것이다.
그나저나 내가 공황장애라는 병으로 얻은 수많은 보물에 대해 말하자면, 이제는 그것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늘어놓을 필요가 없을 듯하다. 타인의 아픔을 조금은 알게 되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하나 더, 마음의 힘이라는 것의 대단함을 몸소 깨달았다는 점도 덧붙여둔다. 아아, 또 하나 더, 나쁜 일이 생기거나 일이 잘 안 풀리는 시기가 이어져도, 그것은 생각지도 못한 ‘좋은 일’이 별안간 찾아오기 위해 필요한 전 단계라고 믿을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