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 호이나키, [산티아고 거룩한 바보들의 길](김병순 옮김), 달팽이출판, 2010.
42ᆢ몇 시간이 지난 뒤 전에 겪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것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무엇인가가 온몸으로 강하게 느껴지며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있다. 지금 상황은 자동차나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는 것처럼 공간을 가로지르며 이동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전혀 다른 느낌이다. 나는 어느 한 공간에 있음을 느낀다. 그러나 실제로는 무수히 많은 공간에 존재한다. 공간은 미세하게 나뉘고 나는 그 속에 존재한다. 수많은 현대적 공간은 실제로는 그리 중요한 것들이 아니다.
43ᆢ 이동하는 순간마다 그 공간들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내 모든 감각의 문은 더욱 열리고 더 많은 것을 인지한다.
45ᆢ 갑자기 두려움이 강하게 밀려오기도 했지만 반면에 어떤 새로운 힘이 내면에서 솟아나면서 온몸을 가득 채운다. 뭔가 불안하지만 분명히 내 안으로 스며드는 것이 있다. 그것을 느낀다. 점점 더 내면으로 깊숙이 들어오고 있음이 느껴진다…… 조용히 기쁨이 밀려온다. 평생 처음으로 세상을 보는 맑은 감각이 생긴다. 새로운 창조의 순간처럼. 예순 다섯이나 나이를 먹은 지금! 좀 진부한 표현이지만 어제도 오늘도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은 나를 둘러싸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지금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주변의 경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속으로 들어가서 새로운 아름다움, 보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게 만드는 선한 일로서 창조에 더욱 더 몰입한다.
57: 다리에 생명을 주듯이 걸어서 여행하는 그런 사람들을 얘기하는 것이다. 여행자는 길에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여행자는 만물의 근원이 되는 힘, 자연이 발급하는 여권을 소지해야 한다. 여행자는 마침내 옛날부터 있었던 어머니 자연이 주는 위협을 실제로 경험하고 자신이 살아 있음을 피부로 느낄 것이다. 그가 입은 상처들은 점점 깊어지다 내면에서 치유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밤에 엄습하는 피곤은 그를 곯아떨어지게 만드는 베개가 될 것이다. 그렇게 그는 시련의 날에 대비하는 경험을 쌓을 것이다.
75: 콤포스텔라로 순례하는 사람들은 대개 성물, 그것의 실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이 가서 보는 야고보의 무덤도 실제로는 비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결국 그 빈 무덤을 채우는 것은 바로 순례자 자신이라고 말하며 기뻐한다…… 이것이 바로 그곳을 순례하는 숨겨진 기쁨이다.
82: 나는 몇 시간 동안 그곳에 있으면서 그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과 천 년이 넘도록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순례하는 각양각색의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서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여러 번 반복해서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들은 왜 편안한 자기 집을 떠났을까? 왜 그렇게 먼 곳까지 여행을 갔을까? 땅 끝이라고 부르는 그 미지의 세계로 그들을 이끈 것은 무엇일까?
마침내 그 대답의 실마리를 찾았다. 그 답을 알고 싶다면 떠나라는 것이었다.
88: 지금 이 순간에도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풍경은 끊임없이 바뀐다. 발이 땅을 디딜 때마다 발바닥 밑으로 느껴지는 자갈과 돌들의 감촉도 끊임없이 다르다. 단 한번도 같은 장소를 밟지 않을뿐더러 땅을 밟는 느낌도 순간순간 언제나 다르다. 땅을 밟을 때 느끼는 단단함, 부드러움, 날카로움의 느낌은 한 순간도 똑같지 않다. 하늘을 흘러가는 구름 모양도 언제나 새롭다. 주위에 보이는 경치 하나하나가 모두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장면들이다. 다른 장소로 빠르게 발을 옮기며 이동하는 가운데서도 어떤 창조의 감각과 그것의 끝없는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자연은 정말 무한하다! 이 사실을 너무도 뚜렷하게 온몸으로 느낀다.
94: 그 기도는 이 순간 내 삶의 흐름에 따라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다. 기도하는 것은 마치 숨을 들여 마시고 내쉬는 것을 규칙적으로 되풀이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 번의 숨은 한 마디의 기도와 같았다. 한 마디의 기도는 한 번의 숨을 통해 평안을 얻는다. 그리서 기도는 새로운 방식으로 내 신체의 일부가 된다. 그 기도는 내가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고 정말로 상상도 해본 적이 없던 기도였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내 기도’가 되었다.
95: 그러자 기도하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생생하게 살아나며 마음 속 깊이 짙은 향내를 풍긴다. 기도에서 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는 바로 그 순간과 꼭 맞고 그 순간 내 신체의 동작과도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새롭게 느껴진다. 전에 산길을 걸을 때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바닥으로 새롭게 느꼈던 감촉과 같은 느낌이다. 기도하는 그 자체가 정신을 집중시키는 것 같다. 어지럽던 마음은 밝은 하늘의 청명함 속으로 금게 사라지고 없어진다. 그것은 분명히 새로운 체험이다. 순례 첫 날, 예수 순례자들이 동행하며 나를 이끌었던 것처럼 오늘도 이 기도가 그 구실을 한다. …… 기도는 대지 위를 걷는 새로운 방식이며 이 세상에서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딘지를 배우는 새로운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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