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뜨거운 아픔

이춘아 2024. 1. 23. 09:34

미야모토 테루, [환상의 빛], 바다출판사, 2015(2014초판).

영화 '환상의 빛' 중 한 장면


(55~ 82쪽)
처음으로 맞이한 소소기의 겨울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눈과 바람과 거친 파도의 나날이었습니다. 메마른 토지와 나가는데 목숨을 걸어야 하는 앞바다만이 의지할 데였던 오쿠노토의  사람들은 도대체 지금까지 어느 정도의 지혜와 인내심으로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일까. 저는 각로를 마주하고 시아버지가 들려주는 예전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했습니다. 다미오 씨의 할머니가 짰다는, 이곳에서는 사코리라 부르는 방한복을 입고 유이치는 옅은 눈 속을 뛰어다니며 놀았습니다.

소금기를 잔뜩 머금은 찬바람 때문에 뺨은 금방 빨갛게 부어올랐고, 게다가 콧물을 문질러댔기 때문에 트고 맙니다. 아마가사키에 살았을 때는 쉴 새 없이 두리번두리번 움직였던 유이치의 눈이 부드럽고 차분해진 것을, 저는 느긋한 마음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재혼하기를 잘했구나, 하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세키구치가에서의 행복한 생활을 한 달에 한 번쯤 좀 과장될 정도로 편지에 써서 어머니에게 알렸습니다. 그런데도 부엌에서 도모코와 함께 설거지를 하면서 목욕탕에서 들려오는 다미오 씨와 유이치의 웃음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아아, 저게 당신과 유이치였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자 허리께가 싸악 차가워지면서 뭔가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두려움에 빠져들었습니다.

그것은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에 대해서가 아니라 돌연히 이 세상에서 사라진, 당신이라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왜 죽었을까, 왜 당신은 치이는 순간까지도 계속해서 선로의 한가운데를 걸어갔던 것일까, 대체 당신은 그렇게 해서 어디로 가고 싶었던 것일까. 저는 그릇을 든 손을 멈추고 설거지대 구석에 시선을 떨어뜨리면서, 지금 바로 죽으려고 하는 사람의 그 마음의 정체를 알려고 필사적으로 이리저리 생각했습니다. 


저는 눈을 감고 세 사람의 숨소리를 듣고 있었습니다. 터널 나가야 시절부터 소소기의 어촌으로 돌아온 긴 시간의 변천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당신을 잃어버린 슬픔은 저 자신조차 몸이 떨릴 정도로 이상한 것으로, 그것은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습니다. 타인의 억측이 미치지 못하는, 아무런 이유도 발견되지 않는 자살이라는 형태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발을 동동 구를 만한 분함과 슬픔이 가슴속에 서리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분함과 슬픔 덕분에 오늘까지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것을 위한 각별한 노력이나 궁리를 한 것도 아닌데 다미오 씨와 도모코는 이제 저에게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도 유이치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키구치 집안 사람이 다 된 것입니다. 저는 당신의 뒷모습에 말을 거는 것으로, 위태롭게 시들어버릴 것 같은 자신을 지탱해왔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뒷모습이 따올랐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떠올랐습니다. 그때 제 마음에는 불행이라는 것의 정체가 비쳤습니다. 아아, 이것이 불행이라는 것이구나, 저는 당신의 뒷모습을 보면서 확실히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저는 어느덧 꾸벅꾸벅 졸며 따뜻한 바다에 떠 있는 기분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십몇 년 전 경찰이 집의 다다미를 들추고 방바닥을 판 날,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을 때의 그 신기한 안도감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저는 거친 바다가 울부짖는 소리도, 덧문이 심하게 흔들리는 소리도, 비 개인 레일 위를 터벅터벅 걸어가는 당신의 뒷모습도 멀리 밀쳐 두고 깊은 안도감 속에 누워 있었습니다. 

다시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왔습니다. 유이치도 초등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대체 무슨 생각에서 다미오 씨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그 후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저는 확실히 이 세상에는 사람의 혼을 빼가는 병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체력이라든가 정신력이라든가 하는 그런 표면적인 게 아닌 좀 더 깊은 곳에 있는 중요한 혼을 빼앗아가는 병을, 사람은 자신 안에 키우고 있는 게 아닐까. 절실하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병에 걸린 사람의 마음에는 이 소소기 바다의 그 한순간의 잔물결이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것으로 비칠지도 모릅니다. 봄도 한창이어서 짙은 초록으로 변한, 거칠어지고도 하고 잔잔해지기도 하는 소소기 바다의 모습을 저는 넋을 잃고 바라봅니다. 

자 보세요, 또 빛나기 시작합니다. 바람과 해님이 섞이며 갑자기 저렇게 바다 한쪽이 빛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어쩌면 당신도 그날 밤 레일 저편에서 저것과 비슷한 빛을 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만히 시선을 주고 있으니 잔물결의 빛과 함께 상쾌한 소리까지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이제 그곳만은 바다가 아닌,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부드럽고 평온한 일각처럼 생각되어 흔들흔들 다가가고 싶어집니다. 그렇지만 미쳐 날뛰는 소소기 바다의 본성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잔물결이 바로 어둡고 차가운 심해의 입구라는 것을 깨닫고 제 정신을 차릴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아아, 역시 이렇게 당신과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기분이 좋네요. 이야기를 시작하면 가끔 몸 어딘가에서 찡하니 뜨거운 아픔이 일어 기분이 좋습니다. 

시아버지의 가래 섞인 기침 소리가 들려옵니다. 배가 고프면 저렇게, 이층에서 농땡이를 피우고 있는 저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뭘 떠올리고 있는 건지, 툇마루에 앉아 싱글싱글 웃으면서 하루 온종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제 슬슬 유이치도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네요.

'문화 책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족  (4) 2024.01.31
분단체제의 그물  (17) 2024.01.23
공황장애가 가져다 준 것  (35) 2024.01.18
진정한 노래  (31) 2024.01.13
답을 알고 싶으면 떠나라  (17) 2024.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