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 김용옥, [나는 예수입니다], 통나무, 2020.
(316~ 322쪽)
내가 십자가에 못박힌 때는 아침 아홉 시경이었습니다. 십자가 꼭대기에 나의 죄목을 적은 명패에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내 좌우로 두 명의 강도가 똑같은 십자가형을 받았습니다. “강도”라고는 하지만 이들도 바라빠와 같은 열성당원이었을 것입니다. “레스타스”라는 말은 “폭도” “반도”의 뜻입니다. 아마도 빌라도는 나와 두 열성당원 사이에 끼어넣음으로써 열성당원 수준의 인간으로 비하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산헤드린의 사람들이 나의 천국운동의 허구성을 폭로하기 위한 장치로 이런 심볼리즘을 만들어냈을지도 모릅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머리를 흔들며 나를 모욕하였습니다.
“하하! 너는 성전을 헐고 사흘 안에 다시 짓는다더니 십자가에서 내려와 네 목숨이나 건져보아라! 요놈아!”
같은 모양으로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조롱하였습니다.
“남을 살리면서 자기는 못 살리는구나! 어디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나 보자! 그렇게만 된다면 우린들 안 믿을 수 있나?”
옆에 있는 두 열성당원들도 똑같은 말로서 나를 희롱하였습니다. 이 모든 모욕은 매우 진실된 사실입니다. 내가 과연 갈릴리에서 그 많은 이적을 행하였다면 지금 이 순간에도 분명히 그러한 이적을 행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십자가에서 맥없이 힘없이 고통스럽게만 죽어가고 있다는 이 사실은 나라는 인간의 최후적 사실입니다.
내가 행한 이적은 이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그것은 민중에게 믿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하나님의 권능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는 하나님은 나를 버리고 있습니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을 때 나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음성, 변모산에서 들렸던 하나님의 인가의 소리가 지금 이 순간에, 그토록 내가 절실하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이 순간에 들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 나는 오직 절망 속에서, 모든 신적인 권능이 단절된 상황 속에서 죽어가고 있다는 이 사실이 나에게는 최종적 기적입니다.
만약 이 기적을 내가 거부했다면 나는 인간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나는 마술사나 허깨비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나의 수난의 최종적 심연입니다. 마가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낮 열두 시가 되자 온 땅이 어둠에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이것을 많은 사람이 뭔가 하나님의 이적인 것처럼 언설을 꾸며댑니다. 그러나 이것은 처절한 절망을 나타내는 어둠입니다. 빛이 단절된, 희망이 보이지 않는 악마와도 같은 어둠이 온 땅을 뒤덮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진 나의 절망, 그 모든 빛이 사라진 고독을 상징합니다. 이 잔을 거두어주옵소서! 나는 골고다에서 그토록 눈물 흘리며 나의 하나님께 빌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나의 하나님은 그 잔을 거두시지 아니하셨습니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이 나의 최후였습니다. 이 광경을 모두 지켜보았던 한 백인대장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었구나!“
나의 십자가 주변에는 나의 가족도, 나의 제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갈릴리에서 소리없이 따라온 여인들만 엎드려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날이 이미 저물었습니다. 아리마대의 사람 요셉이 용기를 내어 빌라도에게 가서 나 예수의 시체를 내어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아리마대는 예루살렘 북쪽으로 30km 정도 떨어져있는 에브라임 지역의 마을인데, 사무엘의 출생지입니다. 아리마대의 요셉은 산헤드린의 멤버였습니다. 그러니까 지체가 매우 높은 명망가의 사람이었죠. 그런데 이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열심히 대망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나의 천국운동이 유대인 상층부에도 극히 일부지만 그 진실이 전달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정도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었기에 아리마대의 요셉은 빌라도 총독을 쉽게 만날 수 있었고 시체를 내어달라고, 묻어주기라도 해야 할 것이 아니냐고 요청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여튼 용기 있는 사람의 행동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이 말을 듣고 나 예수가 분명히 죽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십자가형을 관장한 백인대장에게서 예수가 분명히 죽었다는 사실을 전해듣고 나의 시체를 요셉에게 내어주었습니다. 요셉은 나의 시체를 내려다가 미리 사가지고 온 고운 베로 싸서 바위동굴 무덤에 안치했습니다. 그리고 연자방아처럼 생긴 큰 돌을 굴려 입구를 막아놓았습니다.
안식일이 지나자 막달라 마리아(막달라 마리아는 갈릴리바다 동편의 풍요로운 도시 막달라의 부유한 집안의 여인이다. 예수의 삶과 사상을 온전하게 이해하고 예수의 천국운동에 헌신하였다. AD 591년 교황 그레고리가 이 고귀한 여인을 창녀로 규정하는 바람에 이 여인의 이미지가 크게 왜곡되어 왔다. 성서의 근거가 전무하다. 아르헨티나 신부 요르게 마리오 베르고글리오가 교황이 된 후, 2016년, 교황청은 막달라 마리아를 정식으로 ”사도 중의 사도“로 인정하고 추존하였다. 도올 주)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 이 세 여인은 무덤에 가서 나 예수의 몸에 바를 향료를 샀습니다(이것은 썩어가는 시체의 악취를 줄이기 위하여 보통 행하는 관습니다. 도올 주).
그리고 안식일 다음날(일요일) 이른 아침 해가 뜨자 그들은 무덤으로 가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무덤 입구를 막은 큰 연자방아 같은 돌을 굴려내줄 사람이 있을까요?“
이들이 무덤에 당도했을 때 이미 입구를 막았던 그 돌이 굴려져 있었습니다. 이들이 무덤으로 들어갔을 때 그곳에는 웬 젊은이가 흰옷을 입고 앉아있었습니다. 그 젊은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는 여기에 계시지 아니하다. 우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셨다.“
세 여인은 빈 무덤에서 무서워 벌벌 떨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빈 무덤! 이것이 마가가 전하는 나 예수의 이야기의 대미입니다. ”빔“과 ”떨림” 이것이 나의 마지막을 나타낸 언어입니다.
나는 부활했습니다.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 민중의 지평 위에서 부활했습니다. 아니! 부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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