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는 그 말이 정말 싫었지만요

이춘아 2024. 4. 11. 10:07

유가영, [바람이 되어 살아낼게], 다른, 2023.

(145~149쪽)
그날 이후 9년이 지났습니다. 이제는 괜찮아졌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람을 봐도 아무렇지 않고 졸업한 고등학교를 찾아가도 힘들지 않으니 나는 다 극복해 낸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그랬어야만 했어요. 하지만 요즘도 때때로 찾아드는 악몽이 저를 그날의 바다로 데려갑니다.
해일이 밀려오는 꿈, 내게  닥칠 위기를 느끼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꿈, 나만 살아남아 괴로워하는 꿈, 주위 사람들이 나를 떠나가는 꿈……

제일 최근에 꾼 꿈은 배를 타고 있는데 폭풍이 불어 배가 침몰 위기에 처한 것이었어요. 이런 꿈을 꾸면 저는 단순한 개꿈이라고 생각하며 그 이상은 생각하길 피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도 제가 외면해 왔던 것 중 하나였겠죠.

분명히 그때는 정말 힘들었던 것 같은데 지금 떠올려 보면 시간 속에서는 모든 게 스러진다는 말밖에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토록 잔인했던 기억도 시간이 지나면 무뎌져 그때만큼의 감정이 들지는 않으니까요. 물론 그때는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는 그 말이 정말 싫었지만요. 하지만 기억이, 감정이 무뎌졌다고 해서 저를 괴롭히는게 없어진 건 아니에요. 지금도 때때로 불쑥 찾아오는 형용하지 못할 감정들과 두려움, 불안이 저에게 ‘절대로 잊지 말라’고 일깨우고 있으니까요.

아마 평생 저를 괴롭힐 거에요. 그렇지만 지금의 저에게는 비록 그 괴로움을 극복하지 못하더라도 딛고 일어날 힘이 있습니다. 만약 이 힘이 없었다면 저는 아직도 제 안의 캄캄한 바다에 갇혀 어둠 속을 헤매고 있었을 거예요. 이 힘을 만든 건 제가 여태까지 살기 위해 쳐온 발버둥, 그리고 그걸 알아보고 저를 끌어 올려 준 사람들이 마음이에요. 그날 제 손을 잡고 갑판 위로 이끌어 준 친구부터, 지금까지 만난 많은 사람 모두의 마음이요.

그러니 마지막으로 저를 끌어 올려 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아마 그 사고가 없었다면 평생 만날 일이 없었을지도 모르죠. 그럼에도 저는 이 사람들을 만난 게 제 인생에 다시 없을 행운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사고로 많은 걸 잃었지만 또 얻은 것도 있을 테니 이 또한 그중 하나라고요.

제가 힘들 때마다 이야기를 듣고 도와주신 선생님들. 깊고 어두운 우울에 빠져 헤매고 있을 때 곁에서 슬픔을 나누어 가져가 준 언니 오빠들. 제가 어떤 사람이든, 어떤 일을 겼었든, 너는 내 친구라며 있는 그대로 저를 바라봐 준 친구들. 그리고 제가 일지 못하는,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과 같은 사람들. 저는 이 사람들이 없었다면 결코 일어설 수 없었을거예요.

누군가는 제가 다른 사람들을 도우려 하는 이유가 여태껏 도움을 받아 왔기 때문에 그걸 갚기 위해서일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물론 그것 또한 중요한 부분입니다. 하지만 저를 위한 마음이 더 커요. 누군가의 상처에 공감하고 작은 마음이라도 나눌 수 있을 때 무엇보다 큰 기쁨을 느낍니다. 그러니 제가 사람들을 돕고 싶은 건 모두 저를 위해서예요.

가끔 사고 후 스스로 무엇이 달라졌는지 생각해 봅니다. 제 인생은 많이 변했습니다. 만약 제가 그런 일을 겪지 않고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면 그대로 대학에 입학하고 아마 지금쯤 도서관 사서가 되었을 거예요. 그것 말고도 많은 게 변했을 테죠. 참사는 제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었고, 그 이후로도 저를 힘들게 한 일은 분명 많았습니다. 하지만 지난 시간이 전부 고통으로만 남았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라고 대답할 거예요.

너무 큰일을 겪어 불행하다고만 생각하던 때가 있었지만, 이제는 그곳에서 나올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행운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해리 장애, 우울증과 같은 마음의 병을 오래 앓게 되었지만 그걸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고요.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되었지만 믿을 수 있는 좋은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어요.

모든 것을 놓고 무기력하게 살았지만 그러다 생의 목표를 찾기도 했습니다. 힘든 일을 회피하다가 도망친 그곳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값진 경험들도 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과거로 돌아가 그 일에 대해 선택할 수만 있다면, 당연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쪽을 고를 거예요. 하지만 그럴 수 없다면, 저는 분명히 똑같은 경로로 지금에 다다를 거라 생각합니다.  나를 지탱해 준 사람들을 향해, 내 삶의 목표를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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