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몸의 속도를 맞추며 천천히 기웃거리기

이춘아 2024. 3. 21. 20:23

경민선, [일생에 한번은 순례여행을 떠나라], 21세기북스, 2009.


(326~332쪽)
일본에서 돌아오고 몇 주간, 우체통을 뒤지느라 설레고 들떴었다. 시코쿠 순례길에서 오헨로상들에게 나눠 줬던 엽서가 내 주소를 찾아 속속 날아들었기 때문에 작은 우체통 앞에 설 때마다 순례를 떠나는 환상에 젖어 들었다. 생활인으로 돌아간 그들은 영어로 혹은 알아볼 수 없는 일본어로, 성의 넘치는 서툰 한국어와 정성 어린 그림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밝히고 안부를 물었다.

가장 많은 소식을 주고받은 사람은 단연, 75번 절 젠츠지에서 젠코야도를 운영하는 미스 타케모토 할머니다. 내가 젠고야도 기부금으로 남긴 1,000엔을 반납하느라 할머니가 한 번, 돌려받은 1,000엔으로 하동 녹차를 사서 보내느라 내가 한 번, 고마움을 전하는 할머니의 또 한 번, 건강함을 바라는 나의 또 한 번. 할머니와의 우정은 봄이 오는 길목에서 반가운 손님처럼 곱게 이어졌다.

벚꽃이 후두두 지고 진달래도 져버린 4월 어느 날 스바루호텔의 다카시 상은 와카야마 현의 꿀을 한 단지 보내 주셨고, 60번 요코미네지 근처 산속에서 만난 노숙 순례자 가오리와 에우제니는 5월2일 자전거를 끌고 서울의 우리 집으로 왔다. 정말 뜻밖의 만남, 우연한 해후. 그들은 4년 동안의 긴 여행을 끝내기가 아쉬워 새로운 순례를 계획했다고 한다. 자전거를 타고 일본에서 출발해 한국, 중국, 키르키즈스탄을 거쳐, 티벳을 넘어, 네팔, 인도 바라나시로 향하는 긴 순례를. 지난 3월 일본 전역을 유람하고 배로 부산에 도착, 부산에서 시골 마을을 돌고 돌아 서울로 온 가오리와 에우제니. 꼬질꼬질한 냄새를 물씬 끌고 온 그들은 우리 집에 일주일을 머무는 동안 남대문과 인사동, 도봉산과 북한산을 뻔질나게 쏘다녔고, ‘하자 센터’ 내 여행학교 ‘로드 스콜라’에 초청돼 순례에 대해 강연도 했다.

왕성한 식욕을 과시하며 잠자리에도 일상사 무엇에도 별불평 없이 까다롭지 않게 순응하는 나그네들. 호기심으로 이글거리는 생동감. 평소처럼 오현이는 출근 준비에, 나는 극단 일에 바빴던 아침. 그들은 자전거에 오만 짐을 싣고 골목 너머너머로 떠나갔다. 머리카락에 안기는 투명한 바람, 눈이 아릴 지경으로 당당한 햇살. 사라지는 에우제니와 가오리의 뒷모습을 보다가, 내가 순례길을 걷고 헤매면서 회복한 에너지를 이미 소진해 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쓸쓸하고 슬픈 아침. 그 생생함을 되찾을 순 없는 걸까. 순례 중에 찍었던 사진을 보거나, 낫또와 우메보시를 찾아 먹고, 순례에 관한 글을 쓴대도 시시한 일상은 시시할 뿐. 벌써 약효가 떨어졌나? 다시 떠나야 하나.

이 울적한 고민은 아차산 근처로 집을 옮기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새로 이사한 집은 온달 장군이 장렬히 전사한 아차산 아래 작은 빌라다. 며칠 동안 계속되던 짐 정리를 마무리 짓고, 순례 이후 오랜만에 산에 올랐다. 10여 분만 걸어가면 지하철역과 만나는 이 곳이지만 산속 오솔길은 고즈넉한 공기를 품고 내 몸 깊숙이 들어왔다. 한 걸음 걷자 땀이 솟고, 숨이 목에 차오르고, 눈동자 안으로 색색의 꽃이 들어왔다. 두어 시간 산 속을 헤맨 나는 단비를 맡은 식물처럼 홀연히 되살아나 알 수 없는 기쁨에 들떴다. 모르는 골목길 순례, 한적한 시장 길 순례, 공원 순례, 순례자가 되기로 마음먹으면 지금 당장 단 몇 분이라도 순례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 산에서 알았다.

언젠가 철학자 선생님이 가르쳐 준 ‘상태’라는 단어가 주머니 속에 가만히 만져진다. 내가 어떤 행위의 결과라고만 믿고 갈구했던 생생함의 회복은 사실, 가꾸고 관리해야 할 어떤 ‘상태’다. 매일의 생활을 위해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배설물을 쏟아내는 것보다는 조금 사치스럽지만, 꼭 필요한 행위, 마치 향기로운 차를 마시는 것처럼, 물 끓이는 번거로움을 즐기고 찻잔에 고인 여유에 몸의 속도를 맞추며 천천히 기웃거리기. 이렇듯 삶을 파고든 한 시간 남짓의 도보여행은 일상을 빛나고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그러나 저기 멀리 떠나는 자전거 뒤꽁무니를 보면, 커다란 배낭을 메고 걷는 사람들을 보면, 또 한 번 훌쩍 바람이 불어 끝없이 떠돌고 싶은 충동이 일고, 복잡한 찻집 메뉴를 보고 망설이는 손님처럼 시간이 마련해 놓은 드라마가 궁금해 몸이 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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