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살아봉게 다 니 맘대로 되디야

이춘아 2024. 3. 27. 06:23

정지아 외, [우리는 어디까지 알까], 도서출판 강, 2020.


(36~38쪽)
키가 일 미터 구십 가까운 놈이 눈물콧물 범벅을 하고 꺼이꺼이 울면서 그렇게 말했다. 할머니는 기택이의 피난처였다. 기택이는 애기 때부터 한밤중에도 배가 고파 잠에서 깨곤 했다. 불을 켰다가는 큰아버지한테 식충이 새끼 소리나 들을 게 뻔해서 할머니는 컴컴한 어둠을 손으로 더듬어 밥상을 차렸다. 기택이는 깜깜한 어둠 속에서 할머니가 차려온 밥을 먹으며 자랐다. 나와 자취할 때도 그랬다. 기택이는 시도 때도 없이 밥을 찾았고, 할머니는 언제가 됐든 기택이가 밥 달란 소리만 하면 벌떡 일어나 밥을 차렸다. 귀 어두운 할머니가 밥 달라는 소리만은 기가 막히게 알아들었다.

할머니가 다 받아주니까 애가 뒤룩뒤룩 살만 찌잖아!
언젠가 내가 짜증을 냈더니 할머니가 그랬다.
야가 살이 워딨냐? 빼가 볼금볼금하그만은. 아가, 더 묵어라. 기택이가 언제 밥을 찾을지 몰라 할머니는 늘 밥을 많이 했고, 남은 밥은 당연히 나와 당신 차지였다. 멍청하든 말든, 남을 패든 말든, 기택이는 할머니에게 제일 귀한 종손이었다. 그 할머니가 악의 세계로 발을 디디려는 종손을 막아 세운 것이다.

짝은 아배, 나 잠 도와주씨요. 오거리파가 나를 가만 안 놔둘 것인디, 워디 숨을 디 없겄어라?

다시는 깡패들과 엮이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아버지는 다음 날 기택이를 아버지 친구가 있는 강화도로 보냈다. 그날 밤, 어머니는 오래전 담가둔 매실주를 꺼냈다. 술독에 빠져 사는 형에게 데인 아버지는 평소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우리 식구가 같이 술을 마신 건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날, 어머니는 기택이에게 매실주를 따라주며 말했다.

아가, 택아, 니는 천성이 착해빠져서 넘헌티 새꼬지하고는 니 멩에 못 살 것이다. 에레서도 넘헌테 맞으면 맞았제 때리들 못했어야. 니보다 두 살이나 어린 학성이헌티도 노상 뚜디레 맞았잖애. 긍게 짝은어매 술 한잔 받고 이 매화맹키 순허게 살어라이. 매화는 이삐제, 출 때 펴서 젤 먼첨 봄을 알리제, 열매는 몸에 좋제, 시상에 매화맹키만 살먼 월매나 좋겄냐이. 어머니가 따라준 매실주 덕인지, 결정적 순간에 환시로 나타난 할머니 턱인지, 기택이는 그날 이후 마음을 잡았다. 강화도에서 일 년 남짓 꽃 하우스 일을 돕다가 군대에 갔고, 제대하자마자 가진 건 없어도 마음 착한 처를 만나 결혼을 했다. 막일이라도 나름 기술이 있어 돈도 궁하지는 않았다. 다만 하나, 술이 문제였다.

술잔을 입에 댄 어머니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진저리를 쳤다.
아이고, 오살나게도 쓰다. 이거이 멋이 맛나다고 죽고 못사까이.

술이 술술 들어가먼 잊고자픈 것이 술술 날아가붕게라. 술은 고 맛이지라.
우리 택이는 멋이 그리 잊고자프까? 그만하먼 잘살았는디. 새끼들 잘 키웠제, 마누라 잘 건사했제, 그 이상 멋이 있다냐? 니 몸만 성하먼 돼야.

(39~40쪽)
새 호박전은 동이 나 있었다. 안주라도 먹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무슨 안주를 내놓아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기택이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누나는 가만있소. 짝은어매 젤로 좋아허는 매운탕을 얼릉대령할랑게.
괴기가 워딨다고 무신 매운탕을 끓에야?
짝은어매 줄라고 나가 잡아왔제.

어머니가 매운탕 좋아한다는 것은 금시초문이었다. 내가 아는 어머니는 비린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위가 좋지 않아 매운 것도 금물이었다. 그래서 어머니 모시고 산 뒤로 매운탕을 끓여본 적이 없었다.

매운탕 좋아해? 엄마 매운탕 먹는 거 한 번도 못 봤는데?
글제이. 본래는 안 좋아했어야. 근디 그거이 원젤랑가, 나가 속벵이 도져가꼬 암것도 못 묵고 있는디. 택이 쟈가 매운탕을 끓에 왔드라. 쌀뜸물도 못 넹겠는디 매운탕은 넘어가야? 그거 묵고 나가 살았당게. 택아, 그거이 원제끄나 냉장고를 뒤지던 기택이 끼어들었다.
아따, 짝은어매는. 누나가 안기부헌티 쫓게댕길 때 아니오. 누나는 못 봤제? 그때게 짝은어매, 대꼬챙이맨치 쪼그라들어가꼬 시상 떠날 중 알았당게.

이십대의 나는 고향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명절도 건너뛰기 일쑤였다. 어머니가 어떻게 늙어가는지 알지  못했고, 수배 당한 딸 걱정에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도 관심  밖이었다. 내가 없는 고향에서 어머니와 기택이는 서로 기대어 그런 시절을 보낸 모양이었다. 기택이는 남의 부엌이 제 부엌인 양 냉장고며 싱크대며 맘대로 열어젓히며 매운탕을 끓이느라 바빴다. 평생 노동만 하며 살아 그런지 기택이의 동작은 단순하고 산뜻했다. 각이 잡혀 있다고 할까. 남의 집이라 익숙하지 않을 텐데도 동작에 군더더기 하나 없었다.

(44~46쪽)
기택이가 매운탕을 국그릇 세 개에 나눠 탁자 위에 올렸다. 고추장과 고춧가루 듬뿍 넣어 방앗잎으로 마무리한 매운탕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우리 집에도 방앗잎이 있는데 혹시나 싶어 챙겨온 모양이었다. 머리도 나쁜 놈이 이럴 때는 제법 머리가 돌아갔다. 잡숴봐, 짝은어매. 누나도 한술 떠보소.
밥때 아니면 입도 달싹하지 않는 어머니가 웬일로 숟가락을 들었다.
짝은어매가 매운 거 못 잡숭게 땡초는 뺐어라. 잡술 만헐 것이요.

어머니는 기택이의 매운탕을 한 그릇 뚝딱 비웠다. 근래 이렇게 잘 먹기는 처음이었다. 어머니가 그럴 만하게 감칠맛이 났다. 기택이는 제가 끓인 매운탕을 안주 삼아 어머니가 숨겨 놓았던 소주 한 병을 천천히 비웠다. 소주가 바닥을 보이자 기택이는 숟가락을 놓았다. 매운탕이 반 넘게 남아 있었다. 세 병이나 비웠는데도 취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멍하게 술잔을 바라보던 기택이가 갑자기 밖으로 뛰쳐나갔다. 또 소주를 가지러 가는 모양이었다. 어머니는 기택이가 사라진 현관문을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택이, 틀린 성싶으다. 어쩌그나, 불쌍해서.
다 지가 자초한 거야. 그러게 병원을 왜 안 가? 바보야? 저 지경이면 독하게 마음먹고 술도 딱 끊어야지. 술 하나를 맘대로 못해? 그게 사람이야?

아야, 야멸차게 글지 마라. 사는 거이 다 맘대로 된다디야? 니는 살아봉게 다 니 맘대로 되디야?

워쩔 수 없는 일도 있응게 택이 너무 다그치지 말어라. 애기가 맴이 너무 여려서 근다. 쟈는 먼 일만 생기먼 나헌티 달레왔다. 펑펑 움시로 미주알고주알 다 털어놨어야. 뭔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지만 어머니는 내 얼굴을 슬쩍 보고는 입을 닫았다. 늘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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