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화, [산의 인문학, 지리산을 유람하다], 세창출판사, 2023.
(63~72쪽 )
지리산 권역은 골짜기마다 각각의 특징을 지닌다. 예컨대 하동 청학동은 최치원을 통해 조선조 지식인의 이상향 공간으로 인식되었고, 산청 덕산동은 남명 조식이 들어온 이후로 그 위쪽의 대원동과 함께 도학의 성지로 일컬어졌다. 지리산 청학동은 현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 위쪽 불일폭포 일대를 가리키고, 대원동은 현 대원사가 있는 산청군 삼장면 유평리 일대를 일컫는다.
그 외에 또 하나가 있었으니, 바로 함양 백무동이다. 백무동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온갖 무속 행위가 난무하는 지리산 권역 무속의 성지였다. 그중 대표적인 두 곳이 있었으니, 용유담과 천왕봉 성모사이다. 먼저 용유담을 찾아가 보자.
용유담은 조선조 문인이 함양 마천에서 백무동 계곡을 따라 천왕봉으로 오르는 코스에서 반드시 들르던 곳이었다. 현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임천강 상류에 있는 못의 이름으로, 바위 협곡에 움푹 파여 그 깊이가 수십 길이나 된다고 한다.
용유담은 홍수나 가뭄 때 기우제를 지낸 곳으로도 유명하다.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은 함양군수로 부임한 그해 극심한 가뭄으로 백성들이 고통을 받자, 용유담에서 기우제를 올려 효험이 있었다고 전한다. 태촌 고상안(1553~1623)도 삼가현감으로 있던 1594년 봄에 가뭄이 심하여 용유담에 기우제를 지내러 갔다가 천왕봉까지 올랐다. 이는 이후 용유담이 무속 행위의 대표적 장소로 활용되는 계기가 되었는데, 유몽인이 지리산 권역에서 혹세무민하는 대표적 소굴로 천왕봉 성모사, 백무동의 백무당과 함께 용유담 가에 있던 용유당을 지적한 것이 그 좋은 예이다.
용유담은 지리산 권역에서 경관이 빼어나기로도 유명하였다. 동계 조귀명(1693~1737)은 [유용유담기 遊龍游潭記]에서 지리산의 북쪽 경관 중 이 용유담이 가장 빼어나다고 언급한 후, 용유담 가의 기괴한 바위 모양을 설명하였다. “둥글고 타원형인 것은 패옥과 같고, 움푹 파인 곳은 술잔이나 수통과 같았다. 그 너머로 몇 길이나 되는 바위에는 길 같은 흔적이 굽이굽이 이어져 있는데, 마치 용이 머리를 숙인 듯 꼬리를 치켜든 듯하였다. ‘용유담’이라는 이름은 이런 데서 생겨난 것이다” 라고 하여, 용유담 주변의 바위에 난 흔적에서 그 이름의 유래를 찾고 잇다. 양대박은 용유담의 빼어난 경관이 금강산의 만폭동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였다. 용유담을 읊은 유람시 또한 이처럼 빼어난 경관을 칭송하거나 무속 등 이단에 대한 경계를 표현한 것이 많다. 용유담은 지금도 많은 선현의 석각이 남아 있는 지리산 권역 북쪽 방면의 대표적 명승 중 하나이다.
다음으로 지리산 권역의 또 다른 무속 성지가 있으니, 바로 성모사이다.
성모사는 지리산 천왕봉 꼭대기에 있다. 사당에 성모상이 있는데 그 정수리에 칼자국이 나 있다. 속설에 “왜구가 우리 태조에게 패하여 어려운 지경에 처하자, 천왕이 자기들을 도와주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래서 분함을 참지 못하여 성모상에 칼질을 하고 물러갔다”고 한다. - [신증동국여지승람]권30, 경상도 [진주목], 사묘 성모사
이 기록대로라면 성모사는 천왕봉 꼭대기에 있었고, 그 안에 성모상이 모셔져 있었다. 이 석상을 누가 언제 만들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성모상은, 불가에서는 석가모니의 어머니 마야부인으로 인식하였고, 산 인근의 사람들은 모두 천왕성모라 여기던 신상이 있다. 질병이 있으면 가서 기도하였고, 산속의 승려들도 이 사당에 와서 성모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 외에 이승휴(1224~1300)의 [제왕운기]에 의거해 성모가 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라는 주장도 있었다. 이렇듯 역대로 지리산 성모의 실체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민간에서 조성되어 유행한 의식이었을 뿐, 조선조 유가 지식인들은 지리산신으로 여겨, 자연과 하늘에 대한 숭배 의식이 가미된 장소로 인식하였다. 김종직이 천왕봉에서 다음 날 일출을 보게 해 달라고 제물을 차려 성모에게 기도했던 행위는 이러한 의식에서 발로된 것이라 하겠다.
이후 성모사는 영남과 호남 사람들의 음사가 되어 귀신을 숭상하는 풍습을 양성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예컨대 유몽인은 “인근의 무당들이 모두 이 성모에 의지해 먹고산다. 이들은 산꼭대기에 올라 유생이나 관원들이 오는지를 내려다보며 살피다가, 그들이 오면 토끼나 꿩처럼 흩어져 숲속에 몸을 숨긴다. 유람하는 사람들을 엿보고 있다가, 하산하면 다시 모여든다”라 하였다.
특히 감수재 박여량(1554~1611)은 “임진왜란을 겪은 뒤 사람들이 백에 하나도 남지 않을 정도로 죽어 나가 마을이 쓸쓸해져 더는 옛날의 모습이 아닌데, 세상 밖에 사는 무당이나 승려 같은 무리는 옛날보다 더욱 번성하고 있다. 사찰로 말한다면 금대암, 무주암, 두류암 외에 영원암, 도솔암, 상류암, 대승암 등은 예전에 없던 절이다. 사당으로 말한다면 백모당, 제석당, 천왕당 등은 모두 옛날에 화려하게 지은 것이고, 용왕당, 서천당 등은 새로 지었다. 노역을 피해 숨어든 무리와 복을 비는 백성들이 날마다 구름처럼 모여들어 봉우리와 골짜기에 낟알이 어지러이 널려 있는데도 나라에서 금지할 수 없으니, 참으로 탄식할 만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당시 성모사를 비롯한 지리산 권역의 사당과 사찰이 나라에서도 손쓸 수 없을 만큼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모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와 관련해서는 김종직과 박여량의 기록에 중요한 단서가 보인다. 김종직은 “사당 건물은 세 칸뿐이었다. 엄천리 사람이 새로 지었는데, 나무판자로 지은 집으로 못질이 매우 견고하였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바람에 날아가 버리기 때문이다”라 하였고, 박여량은 “봉우리 위에 판잣집이 있는데, 이 또한 이전에 본 그 모습이 아니었다. 이전에는 한 칸뿐으로 지붕은 판자를 덮고 돌로 눌러서 비바람에 날아가지 않을 정도였다. 지금은 그 규모를 넓혀 세 칸 집을 지었는데, 판자에 못을 박고 판자로 둘러친 벽 바깥에 돌을 에워싸 매우 견고하게 만들었다. 그 안에는 수십 명이 앉을 수 잇었다” 라고 기록하였다.
김종직이 성모사를 찾은 것은 1472년 8월15일이고, 백여량은 1610년 9월5일 천왕봉에 올랐다. 따라서 이들 사이에는 130여 년의 시차가 발생한다. 결국, 김종직이 머물렀던 성모사는 세 칸이었는데, 이후 성모사가 쇠락하여 한 칸으로 줄었다가 다시 세 칸으로 지어졌고, 더구나 한 칸이었을 때는 건물의 지붕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돌을 얹어 놓을 정도의 허름한 집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엄천리는 현 경상남도 함양군 휴천면 남호리 일대를 가리킨다. 곧 천왕봉 성모사는 세 칸짜리 판옥이며, 함양 사람이 지었다.
그런데 우리는 박여량의 기록을 통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그의 일행이 성모사에 도착하여 승려에게 저녁밥을 지으라고 했더니, ‘한 늙은 무녀가 솥을 숨겨 버려서 밥을 할 수 없고, 물통을 아래로 떨어뜨려 버려 물을 길어올 수도 없다’고 하였다. 늙은 무녀가 선비들을 골탕 먹이려고 한 짓이어서 배가 고파도 밥을 해 먹을 수 없고, 목이 말라도 물을 마실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까닭을 물으니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상봉은 진주와 함양의 사이에 있다. 지역으로 말하면 천왕봉 중앙이 경계가 되고, 천왕당으로 말하면 사당의 중앙이 경계가 된다. 그러므로 사당을 짓고 판자를 덮은 사람은 함양의 화랑인 남자 무당이었고, 못을 박아 견고하게 한 사람은 진주의 늙은 무녀였다. 진주는 병영이 있는 곳이고, 함양은 그 병영에 속한 군이다. 화랑과 무녀가 이익을 다투어 서로 싸우는 바람에, 이 봉우리의 사당이 싸움의 빌미가 되었다. 무녀는 사당을 진주의 것이라 하였고, 다른 일을 꾸며 화랑을 무고하여 함양의 감옥에 갇히게 하였다. 그리고 사당에 있던 솥을 숨기고 물통을 없애 유람하는 사람들과 시인들이 먹고 마실 수 없게 하였으나. 무녀의 죄는 이것만으로도 매우 크다. - 박여량, [두류산일록]
이 기록을 통해 몇 가지 단서를 포착할 수 있다. 지금의 지리산 천왕봉은 행정구역상 산청군과 함양군의 영역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천왕봉은 함양군과 진주목의 교차 지점이었고, 성모사가 그 경계에 있었다. 천왕봉 꼭대기의 세칸짜리 조그마한 판옥의 지붕을 덮은 사람과 못질한 사람이 각각 다른 지역의 백성이라는 점, 그것이 빌미가 되어 이 봉우리의 사당이 두 지역의 송사거리가 되었다는 점 또한 재미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성모사를 포함한 천왕봉 인근의 땅은 조선 후기까지도 함양 관아의 소속이었다. 조선 후기의 유산기에 의하면, 함양군 주관으로 천왕봉에 열 칸이 넘는 건물을 지어 관할 수령이 천왕봉을 올랐을 때 묵을 숙소로 사용한 기록이 보이기 때문이다.
성모사의 위치 또한 초기와 후기가 달랐던 듯하다. 지암 이동항(1736~1804)은 [방장유록]에서 ’성모사는 본래 위쪽에 있었는데, 언제 아래쪽으로 옮겨 세웠는지 모르겠다‘라고 의문을 제시하였다. 아마도 성쇠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성모사의 위치가 아래쪽으로 옮겨지고, 본래의 자리에는 조선 후기 함양 관아에서 축조한 수령의 숙소가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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