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실사구시 김여사

이춘아 2024. 8. 2. 22:45

김미옥, [미오기傳],이유출판사, 2024.


(13~18쪽)

유년의 집은 공장을 지나 마당이 있는 살림집이었다. 요즘으로 말하면 청계천이나 문래동에서 볼 수 있는 작은 공장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마찌꼬바’라고 불렀다. 아버지는 마찌꼬바 기술자였다.

네 살부터 공장에서 놀았다. 서너 명의 공장 직원들이 일했다. 과자를 바이스에 넣고 손잡이를 돌리면 과자 가루가 기계로 떨어져 야단을 맞았다. 나를 번쩍 들어서 마당에 데려다 놓으면 울고불고 쳐들어가니 그들이 생각한 것은 내게 공구를 들려주는 일이었다. 그런데 니퍼나 펜치를 손에 들려주면 마당 화초들의 모가지를 댕강 잘랐다. 그래서 드라이버로 바꾸니 나사만 보면 돌려댔다. 라디오고 다리미고 무섭게 해체하니 아버지는 내게서 기술자의 앞날을 보는 것 같았다. 아들들은 기름 냄새가 싫어 도망가는데 막내딸년이 공장에 붙어사는 걸 보고 생각을 달리했다.

작은 프레스같이 생긴 ‘엑기승’이란 기계가 있었다. 거기에 주석 판을 넣고 힘주어 찍으면 톱니바퀴가 세척액 통으로 떨어졌다. 톱니바퀴는 세척액 속에서 금처럼 반짝거렸다. 그 세척액은 도금을 위한 청산화합물액이었는데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내 손의 서너 배가 큰 장갑을 끼고 돌아다녔다.

나는 아버지 껌딱지였다. 밤에 아버지가 모눈종이를 꺼내놓고 금형 설계도를 그리면 연필에 침을 묻혀 따라 그렸다. ‘가다’라는 금형틀이 제작되면 온갖 참견을 했다. 특히 절삭 가공을 하는 선반을 좋아했지만 쇳가루와 불꽃이 위험하니 좀 떨어져서 구경해야 했다. 자석을 들고 가서 쇳가루를 붙이는 장난도 했다. 작업이 끝나면 벗겨놓은 컨베어벨트도 손으로 만졌다. 한 번 꼬인 벨트가 뫼비우스의 띠라는 건 나중에 알았지만 그 당시에는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거렸다.

마찌꼬바의 꽃은 파란 불꽃이 이는 용접이었다. 마스크를 들고 산소 용접기를 사용하여 파란 불꽃을 내는 모습이 미치도록 좋아서 나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쪼그려 앉아 구경했다.

어느 날 용접을 하겠다고 마당에서 뒹굴었다. 나의 고집은 천하무적이어서 때려도 소용없었다. 관철될  때까지 차가운 윗목에 이불도 없이 드러누워 있거나 굶었다. 막내딸 중독 증상이 있는 아버지는 어느 날 마스크를 씌워주며 용접기 사용법을 설명했다.

“너무 가까이 가서도 안 되고 너무 떨어져서도 안 된다. 닿을 듯 말 듯.”

초등학교 4학년까지 나는 공장에서 살았다. 아버지가 공구 상가에 가는 날은 울고불고 따라가서 상가 주인과 하는 대화를 엿들었다. 당시 공구는 거의 일제였는데 나는 아버지에게 손잡이 색깔이 예쁜 독일제 드라이버를 사달라고 졸랐다. 아버지는 한숨을 쉬며 독일제 드라이버를 사주었다. 일자와 십자 드라이버 두 개가 내 것이 되었다.

아버지가 친구 보증으로 공장과 집을 다 날리기 전까지 행복했다. 그때 집안이 풍비박산 나지 않았다면 나는 대한민국 발군의 기술자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특허를 많이 냈는데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노기스 모양을 한 오리발 펜치였다. 노기스는 두께를 재는 공구이다. 오리발 펜치는 훌륭했으나 쇠의 강도가 물러 이빨이 빨리 나가는 것이 흠이었다.

나는 아버지와 오리발 펜치에 사용되는 철판의 강도를 얘기했다. 국산 드라이버와 독일제 드라이버 수명에 차이가 있는 까닭은 쇠 강도가 달라서임을 알아챘다. 아버지는 내가 의견을 말하면 재미있어했다. 내가 왜 독일제 드라이버를 샀는지 이유를 말하면 눈을 휘둥그레뜨고 쳐다보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집이 망하고 내가 좋아하던 공장은 사라졌다. 아버지도 내가 5학년 올라갈 무렵 돌아가셨다. 그러니 나는 나의 공장을 찾을 방도가 없어졌다.

공학을 전공한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그는 일본식 공구 이름을 들이대면 황당해했다. 온갖 공식에 능했으나 실전에는 젬병이었다. 나는 드라이버로 밥솥을 해체해서 재조립하고 세탁기의 설계도를 다운받아 스스로 고쳤다. 키가 닿지 않아 전구를 갈아달라고 하면 용산에 가서 테스터기를 사오는 남자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220볼트거든?”

해외 출장 가는 길이면 그 나라의 칼과 공구 세트를 사왔다 주로 드라이버 위주였는데 각 나라 철강 산업의 현주소를 알 수 있었다. 조립 과정이 엉성한 유모차도 해체해서 재조립하는 것을 보고 남자는 의기소침해졌다.

남자가 두 번 다시 반항하지 않는 결정적 사건이 발생했다. 강원도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져 자전거가 부서진 적이 있었다. 살펴보니 용접만 하면 수리가 가능했다. 자전거포에 갔는데 주인이 없고 종업원만 있었다. 구식 산소 용접기를 쓰는 모습이 아주 서툴렀다. 내가 테스트를 한 후 직접 용접하자 남자는 입을 벌리고 구경했다. 나는 용접을 잠시 멈추고 한마디 했다.

“저리가. 눈 버리니까.”

남자가 내 서재에 있던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을 읽더니 전원생활을 꿈꾸며 주말농장을 하고 싶다고 소원을 말했다. 출가해서 도를 닦기 전에 먼저 농사를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남자 이름으로 100평 정도의 농지를 구입했다. 그린벨트이지만 언젠가 풀릴 것이란 계산속이었다. 농사를 짓고 싶다고 떼를 써서 낫과 호미를 샀다. 낫은 아버지의 공장에서 주문 제작을 한 적이 있어 쇠 강도와 절삭력을 꼼꼼히 살폈다. 시중에서 파는 것은 믿을 수 없어 장충체육관 앞의 대장장이에게서 맞췄다. 그는 나를 위해 담금질에 정성을 쏟았다.

농지의 용도는 밭이었는데 몇 년간 묵어서 거의 잡초밭이었다. 우리는 잡초를 제거하기 시작했고, 5분도 안 되어 저질 체력의 남자가 나무 아래에 앉았다. 나는 낫의 날 방향에 따른 작업의 효율성을 생각하며 일을 했다. 무뎌지는 기미가 보이면 다른 낫으로 교체해서 다시 일했다. 한참 일을 하고 있는데 옆 밭의 할머니가 남자에게 다가오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

“저런 일꾼은 어디서 구했디야? 나도 좀 빌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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