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그리드 누네즈, [어떻게 지내요](정소영 옮김), 엘리, 2021(2022 재판)
(253쪽) 옮긴이의 말
시몬 베유의 말에서 따온 ‘어떻게 지내요’라는 말은 원어인 프랑스어로는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나요’이고, 이웃에 대한 관심은 그의 고통에 귀 기울이는 일이다. 고통의 원인을 밝히는 일이, 잘잘못을 따지는 일이 더 중요하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다. 소설 속 일화들이 진짜 고통받는 삶의 장면이라기보다 연로한 여성 작가의 불평으로 들리기도 한다는 의구심도 있을 수 있다. 문학 작품이라면 ‘이게 무슨 난리인가’ 식의 착잡함만이 아니라 세상을 해석하고 판단하는 기준을 어떤 식으로든 담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에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고, 내가 누군가의 삶을 지옥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주변에 죽음이 만연하고 갈등과 대립이 일상화된 현재의 상황에서는 특히 더 그렇고, 또한 엉망이 된 세상을 관리하게 단순화하거나 조작하지 않고 그대로 직시하는 일에도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모두가 연루되고 손쉬운 해답을 내놓을 수 없다는 것이 재난 상황의 특성이고 우리는 지금 그런 재난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종말을 향해가는 재난 상황에.
(22~26쪽)
다 끝났다고 그가 말했다. 너무 늦었습니다. 우리는 너무 오래 미적거리기만 했습니다. 우리가 저질러온 참담한 실수들을 제시간에 만회하기에는 우리 사회는 이미 너무나 파편화되었고 제 기능을 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어쨌든 사람들은 여전히 관심을 보이지 않으니까요. 해마다 기상이변이 일어나도, 전 세계에서 백만 종의 동물이 멸종할 위험에 놓여도, 환경 파괴가 나라의 주요 관심사로 떠오르는 법은 없지요. 게다가 최고의 교육을 받은 가장 창의적인 계층의 수많은 사람들이, 기대에 부흥하기는 커녕, 초연함, 순간에 집중하기, 주어진 환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세속적인 걱정거리 속에서 평정을 유지하기 따위의 개인적인 치유법과 유사 종교 행위에나 파묻혀 있으니 얼마나 서글픈 일입니까. (이 세상은 한갓 그림자이고 사체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이 세계는 실재가 아니니 이 환영을 실제 세계로 착각하지 말라.) 자기돌봄, 일상의 걱정에서 벗어나는 것, 스트레스를 피하는 것, 이런 것들이 우리 사회 궁극의 목표가 되어버렸습니다. 분명, 사회 자체를 구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해졌지요. 마음챙김을 향한 열광 역시 주의를 딴 곳으로 돌리는 또 다른 수단에 불과합니다. 당연히 우리는 스트레스를 받아야 합니다. 완전히 두려움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마음 챙김 명상은 물에 빠져 죽을 사람이 평정심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타이태닉호를 바로잡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파멸을 막을 수 있는 시기적절한 행동은 내면의 평화를 얻으려는 개인의 노력도 아니고 서로에게 공감하는 태도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임박한 파멸에 대한 광적이면서 과도한 집단적 집착입니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고통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는 것을 부정하거나 그것을 모면할 수 있다고 생각해봐야 아무 소용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선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 하나는 우리는 계속 아이들을 낳아야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때, 청중석에서 웅성거림과 들썩임, 여자의 신경질적인 웃음 같은 동요가 일었다. 이는 또한 새로운 내용이기도 했다. 아이들이란 주제는 잡지에 실린 글에서는 언급되지 않았다.)
분명히 말하지만, 지금 임신한 여성들이 모두 임신중지를 고려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당연히 그런 말이 아닙니다. 제 말은 수 세대 동안 인류가 해왔던 식의 가족계획이라는 개념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그 아이들이 사는 동안 지구가 전혀 살 수 있는 곳이 되진 않더라도, 황량하고 무시무시한 곳으로 변할 가능성이 농후한데, 그런 세상으로 한 인간을 불러내는 일이 어쩌면 잘못일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런 위험이 전혀 안 보인다는 듯이,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는듯이 행동하는 일이 이기적이진 않은지, 어쩌면 심지어 비도덕적이고 잔인하진 않은지 묻고 싶습니다.
게다가 세상에는 이미 존재하는 위협으로부터 보호받기를 절박하게 바라는 아이들이 이미 수없이 많지 않나요? 지금 수백만, 수천만 명이 온갖 인도주의적 위기로 고통받는데, 다른 수백만, 수천만 사람들은 그저 눈을 감아버리기로 하지 않았나요? 이미 고통에 시달리는 우리 곁의 하고많은 사람들에게는 왜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나요?
어쩌면 여기에 우리가 우리 자신을 구원할 마지막 기회가 있는지도 모른다고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종말에 직면한 문명에서 도덕적이며 의미 있는 방책이 딱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인류라는 가족과 우리의 동료 생물들과 아름다운 지구에게 지금까지 저질러온 파괴적인 해악에 대해 어떻게 용서를 구하고 아주 작은 차원에서나마 그 보상을 할지 배우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 서로를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작별인사를 할지 배우는 겁니다.
그는 아이패드를 강연대에서 집어 들고는 빠른 걸음으로 무대 뒤로 사라졌다. 박수 소리에서 청중의 당혹스러움이 묻어났다. 끝난 건가? 다시 나올건가? 하지만 연단에 모습을 드러낸건 그를 소개했던 여자였고, 여자는 청중에게 참석해주셔서 고맙다며 즐거운 밤 보내시라는 인사를 했다.
그래서 다들 자리에서 얼나 무리 지어 강당을 빠져나왔고, 건물 밖, 상쾌한 밤공기 속으로 쏟아져 나왰다. 기록적으로 기온이 높은 해였지만 그곳 그 달의 날씨로는 계절에 딱 맞는 기온이었다.
술 한잔해야겠다. 가까이에서 그런 말이 들여왔다. 나도! 하는 대답도
멀어져가는 사람들 무리에 갈라진 기운이 감돌았다. 어떤 사람들은 멍한 표정에 말이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질의응답 시간이 없었던 것을 지적했다. 너무 거만하잖아. 누군가 말했다. 객석이 꽉 들어차지 않아서 성질이 났나 보지. 또 다른 사람이 말했다.
진짜 재미없어. 그런 말도 들렸다.
네가 오자고 했지, 내가 안 그랬다. 그런 말도.
완전 신파야…… 무책임하고, 이런 말도 들렸다.
하나같이 다 맞는 말이야 이런 말도.
(분개한 목소리로) 도대체 그래서 뭘 어떻게 하자는 거야? 이런 말도.
(238~239쪽)
집에 와서 기쁘다고 친구는 말했다. 집을 떠난 게 실수였다고. 잘못된 생각에 굴복한 거였고 그래서 벌을 받은 거라는 생각을 고수했다.
이제 집에 돌아왔으니 절대 집을 떠나지 않을 거라고 했다. 설사 상태가 나아진다 해도 밖에 나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바로 길 건너의 공원, 친구가 오랫동안 무척 좋아했던 장소이고 한여름인 지금 무성한 초록 그늘이 좋은 안식처를 마련해주는 그곳에도 가지 않을 것이었다. 균형 감각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기 때문에 넘어질까 봐 겁을 냈다. 그리고 다른 이유도 있었다. 다음-마지막-단계로 접어들자 친구는 내면으로 침잠했다.
볼일을 보러 나가면 난 간혹 들어가기 전에 공원에서 잠깐 시간을 보낸다.
대개 벤치에 앉자마자 울곤 했다.
맙소사, 이렇게 될 일이 아니었잖아. 지금으로선 불가피했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런데 사랑이란 언제나 딱 그런 느낌이 아니던가. 아무리 뜻밖이라도, 아무리 있을 법하지 않아도, 운명적으로 그렇게 되고 만다는.
우연의 일치. 요즘 새로 읽고 있는 책에 죽어가는 사람을 지켜보는 경험을 사랑에 빠질 때의 강렬함과 비교한 대목이 있다. 그러니 어떤 언어에 그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가 있다 해도 놀랄 일이 아니지. 보도 종족이 사용하는 ‘온스라’처럼, 그 특정한 형태의 사랑을 표현하는 단어 말이다.
이 모든 일(이 모든 일: 가차 없는, 형언할 수 없는 그것)이 먼 과거의 기억이 됐을 때는 과연 어떨지 알고 싶다. 더없이 강렬한 경험이 결국엔 얼마나 자주 꿈과 비슷해지는지, 난 늘 그것이 싫었다. 과거를 보는 우리의 시야를 온통 지저분하게 뭉개놓는 그 초현실적 오염 말이다. 실제 일어난 그토록 많은 일이 어째서 진짜로 일어나지 않은 듯이 느껴지는 걸까? 인생은 한갓 꿈일 뿐. 생각해보라. 그보다 더 잔인한 관념이 과연 있을 수 있나?
기억. 우리 안에 여전히 살아 있는 과거의 사건들을 바라보는 방식을 표현할 다른 단어가 필요하다고. 그레이엄 그린은 생각했다.
내 생각도 그렇다.
(242~244쪽)
우리가 돌연 말을 나누지 않게 됐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 식은 아니었다. 그 사태로 인해 그 집에서 나오기 전에도 우리는 친구가 기침이 나오거나 숨이 찰 만한 대화는 하지 않았다. 서로 나눌 얘기가 없어진 게 아니라 말을 해야 할 필요가 줄어들었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표정이나 몸짓, 슬쩍 건드리는 일 -때로는 그 정도도 필요 없었다- 만으로도 다 이해할 수 있었다.
친구는 자신의 여정의 끝이 가까워올수록 그 무엇도 집중을 흐트러뜨리길 원하지 않았다.
더 이상 내게 책을 읽어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조금씩 다시 직접 책을 읽을 수 있기도 했지만. 집을 비운 사이 소포 하나가 와 있었다. 예전 학생이었던 아는 작가가 쓴 책의 교정지로, 표지에 들어갈 짧은 평을 요청하는 거였다.
마지막으로 좋은 일 좀 하지 뭐. 친구가 말했다.
친구가 읽는 마지막 책이 될 것이었다. (더 인상적인 말로 치자면, 그 짧은 평이 친구가 쓰는 마지막 글이 될 거라고 하고 싶었는데, 그럴 가능성이 다분하긴 하지만 맞는 말일지 확신할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같이 신나게 웃는 것도 잊지 말자고.
우리는 차에 짐을 잔뜩 싣고 멀리로 차를 몰았다. 아무 말 없이 몇 킬로미터를 달렸을 때 불쑥 비통하고 낮은 목소리로 친구가 내뱉었다. 죽어라 애쓰고 죽어라 계획해봐야.
내가 제대로 들은 건가? 그것은 우리가 함께 본 영화의 대사였다. 오래된 괴짜 코미디 영화로 주인공 한량이 어떤 상속녀와 결혼한 후 그 상속녀를 없애버릴 계획으로 작업을 거는 내용이었다. 그 나쁜 놈은 일이 엉망이 되자 분통을 터뜨리며 이렇게 외친다. 망할, 망할, 망할! 죽어라 애쓰고 죽어라 계획해봐야 제대로 되는 게 단 하나도 없네! 그 장면에서 우리는 배를 잡고 웃었다. 그리고 지금 분명 친구는 언짢은 마음으로 한 말이었지만 그 상황에서 너무나 어처구니없게 들려서 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친구는 처음엔 좀 놀랐지만 곧 따라 웃었다.
아니, 아무도 오지 않았으면 해. 작별 인사는 이미 다 했어. 친구가 말했다.
아니, 마지막으로 딸에게 연락하는 것도 원치 않아.
그냥 서로 화해할 수 없다는 사실과 내가 화해를 했어.
(249~252쪽)
나 역시 바로 오늘 아침에 누군가와 싸웠다고 말해줄 수도 있었다. 미친 여자처럼, 공원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미친 여자처럼 지금 당장 끼어들 수도 있다. 싸우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서 내가 싸운 일을, 그날 아침 전화로 전 애인과 싸웠던 일을 다 말해줄 수도 있다. 못 할 것 같다고, 거짓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고 그에게 말했기 때문에. 우린 했던 얘기를 또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한번. 내 친구의 사망 시점에 내가 그곳에 있으면 당연히 심문을 받을 거라고 그가 말했다. 알아. 안다고. 당연히 아니까 그러지- 똑같은 말을 도대체 몇 번이나 하는 거야?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나는 내가 거짓말을 하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울지 상상할 수 있었다. 아니면 적어도 납득할 수 있는 거짓말을 하는 게.
그 말을 했을뿐이다.
그런데 그가 폭발했다. 정말 딱 당신다워. 역시 수없이 들은 말이었다. 당신은 가망이 없어. 그가 말했다.
정말 딱 당신다워. 무슨 일로 짜증이 나건, 우리 사이에서 뭐가 잘못되건 늘 딱 당신답다고 했다.
그가 실제로 그렇게 말했다.
정확히는, 고함을 질렀다.
공유 정신병(프랑스어로 ‘두 사람의 광기’라는 뜻으로, 밀접한 관계에서 서로 감응하며 정신병이 악화되는 것을 가리킴). 전 애인은 친구와 내가 하는 일을 그렇게 표현했다.
이제 손을 떼겠다고 했다.
미친 여자. 가장 두려운 게 무언지 말해봐. 공원 벤치에 장바구니를 놓고 앉아 있는 미친 늙은 여자. 축복의 말을 했다가 욕을 했다가. 그런 종류의 여자 이야기. 내 어머니가 가까스로 면했던 운명. 이제 일어나서 가야겠다. 아이스크림이 녹고 있을 거야. 생선도 상할 거고. 그런데 머리가 어지럽네. 일어서면 현기증이 나서 쓰러질 것 같아. 공황 상태에 빠진다. 지금 이게 무슨 일이지?
비와 쓰레받기를 든 남자, 다람쥐와 새에게 먹이를 주던 여자는 둘 다 자리를 떴다. 프랑스 연인들도 (아, 좋아. 화해한 게 분명해. 남자가 여자에게 팔을 두르고 여자는 남자 가슴에 고개를 묻고 있잖아) 자리를 뜨려고 한다.
이게 무슨 일이지? 공포로 심장이 쿵쾅거린다. 곧 끝날 거야. 이 동화 같은 일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가장 슬픈 이 시간은 지나갈 거야. 그러면 혼자가 되겠지.
애도하는 자들에게 축복이 있기를.
독자들이 소설로 이끌리는 것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한기로 떨리는 그들의 삶을 따뜻하게 덥히고 싶은 마음에서라고 베냐민은 말했다.
나도 애를 썼다. 단어를 차례로 놓았다. 그 모든 단어가 다른 식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모든 다른 삶이 그렇듯 친구의 삶도 다른 식이 될 수 있었던 것처럼.
나는 애를 썼다.
사랑과 명예와 연민과 자부심과 공감과 희생 -
실패한다 한들 무슨 상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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