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4일 밤 무사 귀환했습니다.
홍콩에서 돌아오는 날 날이 맑아지면서 반팔 입은 사람들도 눈에 띄였는데,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은색이었습니다. 교통사정이 안좋아 인천공항서 지하철로 서울역으로 와서 기차타고 내려왔습니다.
추울 때 새해를 맞이해야 새해같았는데, 이제야 새해를 실감합니다.
썼던 글 보냅니다.
2010. 1. 2
홍콩 영화
이춘아
홍콩에 와서야 나에게 홍콩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하다 ‘홍콩 영화’를 떠올렸다. 홍콩반점, 홍콩영화, 홍콩독감 등 마치 형용사격으로 사용되었던 ‘홍콩’. 부산 출신인 나는 알게 모르게 홍콩과 부산을 동일시해왔다. 기억나는 것은 배가 항구로 들어서면 부산 야경이 홍콩 야경과 비슷하다는 등 항구로서의 이미지였고, 밀수가 횡횡하던 시절, 홍콩으로부터 밀수입되어 들어오는 곳이 부산이기도 하였다. 와보니 과연 입지조건이 여러 가지로 닮아있었다.
우선 산의 모습이 비슷하였다. 평지를 끼고 완만하게 바다로 이어지는 산이 아니라 평지가 거의 없이 산이 바다와 맞닿아있다. 솥뚜껑을 엎어놓은 산지형이라 하여 釜山이라 하였다고도 하였다. 해서 원래는 부산의 동쪽 지역이었던 동래 부근에 사람들이 주로 살았던 것인데, 일본이 한국을 발판으로 중국으로 뻗어가기 위해 부산항으로 확대하고 철도가 들어오면서부터 바다를 메꾸어 항구 중심의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 6.25 전쟁이 터지면서 피란민들이 갑작스럽게 부산으로 몰려 내려오면서 산등성이(우리는 ’산만대기‘라 불렀다)에 판잣집들을 짓기 시작하였고, 밤에 배가 부산항으로 들어올 때 산만대기 판자촌의 불빛이 마치 홍콩의 고층빌딩과 같았는데, 막상 낮에 보니 고층빌딩은 오간데 없고 판자 집만 다닥다닥 붙어 있어 놀랐다, 더라는 이야기를 어려서부터 들어왔다. 나 역시 피란민의 자식이었기에 피란민촌에서 자랐고, 부둣가에서 석필을 주어오기도(훔쳐오기도) 했었다.
무작정 높은 고층 건물과 어딜 가나 명동 한 복판처럼 붐비는 사람들, 탁한 공기, 내가 이런 곳에 왜 왔나, 하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거주인구 7백만, 유동인구 포함하여 천만명이 밀집되어 있는 이곳을 이해해보기로 하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으리라. 그럴 때 역시 박물관을 찾는 것이 좋다. 홍콩역사박물관을 가보니 이해되었다. 서구 열강들이 중국의 교두보로 삼았던 곳이 홍콩이었고, 영국의 식민지, 일본의 식민지를 거쳐 다시 영국령이 되었다가, 중국으로 흡수되면서 현재 한시적인 특별행정자치구역으로 되어있는 곳. 전쟁을 피해, 공산주의를 피해 중국 본토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홍콩으로 유입되었다. 이토록 밀집되어있어도 사람들은 살아갈 수 있구나, 라는 그 이상의 표현이 안되는 곳이 내가 본 홍콩 모습이었다.
홍콩 영화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래서 목록을 검색하면서 들어보았던 제목 중심으로 한국사이트에서 영화를 다운 받아 홍콩에서 보았다. 무술 영화, 사극 등의 영화 외에 어둡고 쓸쓸한 이미지를 주었던 영화들이 기억났고, 홍콩지하철에서 보았던 사람들의 어두운 얼굴을 영화를 통해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기본 정서는 ‘알지 못하는 슬픔’이다. 영웅본색, 아비정전, 패왕별희, 해피 투게더, 무간도 등등. 그러다보니 장국영, 양조위, 유덕화가 나오는 영화들이었다.
몇 년전 자살했다고 떠들썩 했던 장국영이라는 인물이 궁금해져 검색해보니, 1956년 홍콩 출생 2003년 사망. 나와 같은 해에 태어난 배우였다. 홍콩영화자료관을 찾아갔다. 한국책자 설명에 지하철 역명이 잘못 표기되어있어 그 날은 찾지 못하고, 인터넷 검색하여 그 다음날 찾아갔었다. 香港電影資料館 filmarchive 그곳에서 홍콩영화잡지 2003년 7월 장국영 추모특집도 보았고, VCR자료로 장국영 추모영상물을 영화관 상영비와 맞먹는 비용을 주고 그곳에서 보고 왔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잘 모르지만 같은 나이의 홍콩배우 장국영의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어렴풋이 그 시대가 갖는 동병상린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홍콩 사람들의 얼굴이 어둡다고 앞에서 말했는데, 길에 서 있다 보면 나에게 뭘 물어보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갑작스런 중국말에 멍하니 쳐다보고 있을 때가 많았는데, 나 역시 별반 다를 바 없는 어두운 표정의 홍콩사람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영화자료관에 비치된 리플렛이 있어 가져와 읽어보니 [장애령과 電影(Eileen Chang& Film)]이라는 기획으로 영화상영과 세미나 일정이 소개되어있었다. 처음에는 장애령이란 배우가 출연한 영화를 보여주는 줄 알았었다. 자세히 읽어보니 홍콩 초기 영화사에 영향력을 끼친 작가였다. 영화를 사랑했던 그녀는 처음에는 에세이나 소설에서 영화를 다루었는데, 영화 문법grammar에 영향을 주었다고 하며, 영화 스크립트를 직접 썼고, 그녀의 소설이 영화화되었다. 그녀의 소설이나 스크립트가 영화로 제작되었던 것중 14편을 2010년 상반기 6개월간 매주 토요일 상영하며 세미나도 한다는 것이었다.
소개된 영화들이 1947년 영화부터 2007년 영화에 이르는 것으로 보아 이들 영화 역시 나의 삶에 영향을 주었던 것들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최근 영화인 2007년 이안 감독의 ‘色, 戒’가 그녀의 소설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영화는 아주 인상 깊게 보았던 영화였고, 그 이전의 영화제목들 역시 내가 어려서 우리 동네 영화관 간판에서 보았거나 실제 보았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장애령은 홍콩 사람에게뿐 아니라 한국 사람인 나에게도 의미있는 작가였던 것이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 가장 먼저 글로벌해지지 않았나 싶다. 엔터테인먼트로서 영화가 세월이 보태어지면서 그 세월 따라 자극된 우리의 감성을 동질적으로 만들었다. 당대의 작가와 감독, 배우들이 만든 영화는 그 시대의 감성이 반영되어있고, 몇 십년 세월이 지난 뒤 이들 영화를 모아서 보니 내가 살아온 시간들과 시대상이 보이고 내가 어떻게 살아왔었는지 돌아보게 된다는 것은 또 다른 기록물이 된다.
나는 영화보기를 좋아하는 사람일 뿐 영화전문가는 아니었기에 서울에 영상자료원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가 볼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홍콩에 와서야 홍콩 영화는 나에게 무엇이었던가를 생각하면서 홍콩영화도 보고 홍콩영화자료관을 다녀오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기회 되면 우리나라 영상자료원에도 가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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