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곳곳에 다양성을 부여하는 관점으로
‘원도심’을 다시 보자
2016년 10월 28일
원도심활성화라는 말을 들어 온지 꽤 됐다. 최근 20~30여년 사이에 대도시의 팽창으로 인해 도심의 위치가 이동되었다. 위치 이동으로 상권과 함께 문화권도 이동되었다. ‘원도심’이라 불리게 된 곳이 공동화되면서 원도심 활성화라는 단어를 많이 듣게 되었다. 대전 역시 원도심 활성화 프로젝트들이 그동안 많이 만들어졌지만 내 마음은 그저 그랬다.
6년전 부산원도심문화창작공간 조성 기념식에 갔다. 장소는 중앙동 40계단 부근이라 했다. 부산의 원도심문화창작공간 조성 기념식에 갈 때만해도 의례적인 행사참석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행사 시간 좀 늦어 도착했다. 부산출신으로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행사장소를 잘 모르고 간 것이다. 당황했다. 오래전 예술가들이 모여든 찻집과 서점들이 있었던 그 부근이 원도심문화거리이겠거니 했던 것이다. 원도심 문화창작공간조성 기념식이 있었던 40계단 부근에 막상 도착하고 보니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 잠깐 살았던 장소였다.
아! 그런 곳을 원도심이라 하는구나. 그때부터 과거의 기억과 함께 원도심의 개념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내가 살았던 과거의 도심공간이었던 곳을 지금의 사람들은 마치 역사속의 공간으로 ‘원도심’이라 부르니 내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에서 현재로 순간 이동한 느낌이었다. 40계단 부근으로 가까이 오자 40여년전의 기억영상 필름이 초고속으로 되감겨 돌아갔다. 그리 길지 않은 햇수였지만 몇해 살았던 곳이었고 그리 좋지 않았던 기억이 고여 있던 곳이었다.
주택이 아닌 빌딩 같은 건물의 3층 방, 좁은 계단으로 올라가는 어두운 방에 세를 들어 살았었다. 그 당시도 상업 지역이었던 그곳은 거리가 4-5층 건물로 줄지어 있었다. 거리는 건물로 그늘져 있어 어둡고 추웠다. 그러나 40계단 위 산복도로 쪽으로 올라가면 그 쪽은 활기가 있었다. 버스비를 받아 산복도로가 난 길로 군것질하면서 구경하며 걸어 다녔다.
길가 좌판의 고래고기, 무시무시하게 과장된 그림의 회충약 파는 아저씨들이 줄지어 좌판을 벌이고 있었지만 그 길을 걸어 다니는 재미가 있었다. 그리고 만화가게들. 어두움과 나름의 밝음이 교차되는 그 부근을 이제와 사람들은 원도심이라 부르고 있었다. 그곳은 나의 유년의 기억이 담겨있는 곳이었다. 많은 가족들이 생계를 위해 여러 곳을 이주해 다녔던 것처럼 우리 가족도 이주가 잦았기에 나의 유년 기억은 조각조각 분산되어 퍼즐 맞추기를 해야 한다.
장소성의 역사와 문화를 살리는 작업은 중요하다. ‘장구한 개항의 역사, 다양한 디아스포라의 문화자산을 지역정체성으로 갖고 있는 부산, 한국전쟁의 상흔을 특유의 포용성으로 품어 한 시기 우리나라 문화의 중심으로 꽃피웠던 곳’으로 시작되는 부산 중앙동과 동광동 일대의 원도심문화창작공간은 이제 문화재 야행 사업의 한 코스가 되기도 한다.
사회적 형편상 도심지는 늘 이동된다. 그리고 그 자리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바뀐다. ‘원도심’이라는 개념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도심지로 정착되는 그 당시의 여러 가지 조건으로 정착되는 형성기는 분명 있지만, 그 시점을 스쳐 지나는 단편적인 기억만을 갖고 있는 사람들, 또는 아무런 기억을 갖고 있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때 그 시절 이상의 의미가 없다.
그렇다고 ‘원도심’이라는 단어 또는 개념을 삭제한 채 활성화프로젝트를 만들기는 애매하지만, 도시 인구의 전체비중에서 ‘원도심’이라는 단어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은 이제 소수가 되었고, 관광용 단어가 되어버렸다.
‘원도심’이라는 개념을 대체할 만한 단어는 없을까? 문화창작공간조성 프로젝트가 성공하여 그곳이 활성화되는 그 날이 오면 ‘원도심’ 단어는 퇴색될 것이다. 한때 서울의 인사동, 명동이 공동화되는 시점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 국내외관광객들과 젊은이들로 넘쳐나는 장소가 되었다. 도시 곳곳에 다양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관점으로 다시 ‘원도심’을 바라보아야하지 않을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