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5.9(토)
김영갑 사진.글, [그 섬에 내가 있었네], human & books, 2004
“오름에서 맞는 오르가슴”
종종 안개비에 젖어 섬은 제 모습을 숨기고 나를 외롭게 만든다. 섬에서도 내가 사는 중산간 마을은 유독 안개가 많고 비가 잦다. 광활한 초원의 목초지가 수평선까지 이어지고 소와 말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다. 군데군데 솟아 오른 오름들은 이국적인 정취에 빠져들게 한다. 인기척이라곤 느낄 수 없는 중산간의 초원은 고요하고 평화롭다.
선이 부드럽고 볼륨이 풍만한 오름들은 늘 나를 유혹한다. 유혹에 빠진 나는 이곳을 떠날 수 없다. 달 밝은 밤에도, 폭설이 내려도, 초원으로 오름으로 내달린다. 그럴 때면 나는 오르가슴을 느낀다. 행복감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살아 있음에 감사한다.
도시보다는 자연에서, 낮보다는 밤에, 나의 성감은 자극을 받는다. 건조한 곳보다는 습한 곳에서, 햇빛 쨍한 날보다는 안개 짙고 가랑비 내리는 날이면 발동이 걸린다. 여름이면 여름대로, 겨울이면 겨울대로 느낄 수 있는 오르가슴. 소나기 지나고 무지개 뜰 때면, 바람 심한 억새꽃 춤추는 한낮에도, 하늘과 땅이 사라지는 눈보라 속에서도 오르가슴은 찾아온다.
그 절정의 기쁨을 느낄 때마다 나는 다짐한다. 죽는 날까지 자연을 떠돌아 다니리라. 홀로 초원에 묻혀 살아가리라. 끼닛거리가 없으면 없는대로, 외로우면 외로운 대로 살아가리라. 모두를 망각하고 초원으로 바다로 흘러가리라.
힘든 육체노동을 하면서도 자연을 떠나지 못하는 이들을 여럿 만났다. 약초를 찾아 떠도는 이들, 토굴 속에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면서도 자연을 벗해 늙어가는 사람들이었다. 도회지 출신이면서 외딴 섬에 묻혀 지내는 이들도 여럿 만났다. 바다에서 산에서 문명을 멀리한 채 살아가는 그들의 진정을 나는 알았다. 불편해도 그렇게들 살고 있구나! 산사람들이, 바닷사람들이 말하던 ‘살 맛’이 바로 그것이었구나!
꿈속에서 몽정을 경험하듯 자연 속에서 오르가슴을 경험한다. 아침저녁 홀로 초원을 돌아다니다 보면 오르가슴을 느낀다. 신선한 공기, 황활한 여명, 새들의 지저귐, 풀 냄새, 꽃향기, 실바람... 그 모든 것들이 인위적으로 만들 수 없는 절묘한 조화를 부린다. 소와 말들이 한가로이 노닐고, 새들은 제 흥에 겨워 조잘거리고, 풀잎에 몸을 감춘 벌레들은 사랑을 속삭인다. 벌 나비는 꽃향기를 따라 날갯짓한다. 자연이 인간에게 베푸는 축복이다. 오르가슴을 경험한 이는 자연을 떠나지 못한다. 이제는 도회지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런 것을 경험할 때마다 점점 자연에 매혹된다.
중산간 광활한 초원에는 눈을 흐리게 하는 색깔이 없다. 귀를 멀게 하는 난잡한 소리도 없다. 코를 막히게 하는 역겨운 냄새도 없다. 입맛을 상하게 하는 잡다한 맛도 없다.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그 어떤 것도 없다. 나는 그런 중 산간 초원과 오름을 사랑한다.
눈으로 보아도 보이지 않고, 귀로 들어도 들리지 않고,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는 것. 형상도 없는데 사람을 황홀하게 하는 그 무엇이 중산간 광활한 초원에 존재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최고의 것은, 사람을 황홀하게 하는 그 무엇이다. 그것을 깨닫기 위해 나는 중산간을 떠나지 못한다.
눈에 보이지 않으나 분명히 존재하는 영원한 것을 이곳에서 깨달으려 한다. 말할 수 없으나 느낄 수 있고, 보이지 않으나 느낄 수 있는, 사람을 황홀하게 하는 신비로움을 찾으려 한다. 자연 속에 묻혀 지내며 마음을 씻고 닦아 모두를 사랑하려 한다. 눈에 보이는 것은 영원할 수 없다.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을 느끼고 확인하고 싶다.
안개가 일순간에 섬을 뒤덮는다. 하늘도, 바다도, 오름도, 초원도 없어진다. 대지의 호흡을 느낀다. 풀꽃 향기에 가슴이 뛴다. 안개의 촉감을 느끼다보면 숨이 가빠온다. 살아 있다는 기쁨에 감사한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걱정도, 끼니 걱정도 사라진다. 곰팡이 피어가는 필름 생각도, 홀로 지내는 외로움도 잊는다. 촉촉이 내 몸 속으로 안개가 녹아내린다. 숨이 꽉꽉 막히는 흥분에 가쁜 숨을 몰아쉰다. 자연에 묻혀 지내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이 기쁨, 그래서 나는 자연을 떠나지 못한다. 오르가슴을 느끼는 이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다.
초원에도, 오름에도, 바다에도 영원의 생명이 존재한다. 대자연의 신비와 경외감을 느낌으로서 나는 신명과 아름다움을 얻는다. 나는 자연을 통해 풍요로운 영혼과 빛나는 영감을 얻는다. 초원과 오름과 바다를 홀로 거닐면, 나의 영혼과 기억 그리고 자연이 하나가 되어 나의 의식 속으로 스며든다. 그럴때면 훌륭한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간절한 바람도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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