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낭독 "내 삶의 길라잡이"

이춘아 2020. 5. 10. 06:42

 

2020. 5.10(일)

 

김영갑 사진.글, [그 섬에 내가 있었네], human & books, 2004

 

 

“내 삶의 길라잡이”

 

제주에 정착하기 전 사진을 찍으려 자주 왕래할 때에는 새벽밥을 먹고 서울 집을 나서 섬에 도착하면 한밤중이었다. 열 시가 넘으면 시외버스도 끊겼다. 시내 여관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아침 카메라를 둘러메고 나섰다. 비행기를 타면 시간이 절약되지만 나는 굳이 배편을 고집했다. 멀고도 힘든 길을 택한 건, 바닷길을 이용해 육지를 드나들던 제주 사람들의 애환을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하늘길이 열리기 전 제주 사람들에게 육지 왕래는 목숨을 건 모험에 가까웠다. 누군가 육지 나들이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마을에서 잔치를 열어줄 정도였으니,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험난한 여정이라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배라야 요즘 같은 대형 여객선도 아닌 자그마한 어선인데 큰 바람이라도 만나는 날엔 그 길은 황천길이나 다름없었다. 

 

제주도와 제주 사람들을 이해할 때까지는 절대로 하늘길로 다니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계속되는 여정에 몸은 고달팠지만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세상과 다양한 삶을 경험할 수 있었다. 

 

주로 목포항이나 완도항, 부산항에서 제주행 여객선을 탔다. 그리고 2등 선실에서 노인, 장사꾼, 뱃사람들과 어울렸고, 그들을 통해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발견했다. 항로에 따라 열두 시간이 걸리기도 하는 지루한 항해에서 나는 전라도나 경상도 사람들보다는 제주도 사람들을, 젊은이보다는 노인들 틈에서 이야기를 들었다. 노인들은 살아 움직이는 제주도의 역사다. 그들을 통해 제주의 역사를 전해 들으면 제주 사람들의 삶을 여렴풋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다. 

 

섬에 머무는 동안 나는 노인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처음에는 그들에게서 무슨 얘기를 끄집어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그들의 역사를 아는 것이 맨 처음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삼성혈 신화에서 4.3사건까지 그들의 얘기를 귀담아듣고 나름대로 제주 역사를 정리했다. 그리고 사진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가 생각했다. 무엇을 찾아서 보고 느끼고 담아야 할지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계획을 세웠다. 

 

처음부터 제주도 전체를 이야기할 수 없으니 가능한 부분부터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우선 해안 마을을 이해하고, 그 다음에는 중산간 마을의 삶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섬에 머무는 동안에는 시내보다 외딴 시골 노인들의 집에서 잠자리와 먹을거리를 해결했다. 

 

노인들은 옛날 그대로의 방식으로 삶을 꾸려갔다. 아궁이에 나무를 때서 밥을 짓고, 반찬도 날된장에 푸성귀나 젓갈이 전부다. 제주 사람들의 절약정신은 유별나다. 가뭄이나 흉년에 적응하다 보니 절약이 몸에 배어 있다. 책을 통해서는 알 수 없는 그들의 삶의 비밀을 이해하기 위해 토박이들처럼 부족한 삶을 온몸으로 겪었다. 

 

노인들을 따라 들로 나갔다. 숨쉬기조차 버거운 바람 속에서 새벽부터 저녁 어스름까지 일하는 노인들 곁에서 온종일 밭일을 거들었다. 두툼한 외투를 입어도 한겨울 찬바람을 다 막아주지는 못했다. 점심도 찬밤 한 덩이가 전부다. 일 년 내내 밭을 기어 다니며 일해도 궁색함을 면하기 힘든 게 그들의 생활이었다. 서울에선 상상조차 못했던 삶이다. 

 

그들을 통해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형편없고 가치 없는지 깨달았다. 자신만만하게 세상과 삶에 대해 떠벌렸던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들의 삶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나는 말수가 적어졌다. 

 

바닷가 마을에는 늙은 해녀들을 위해 할망 바다가 할당되어 있다. 젊은 해녀들은 깊은 바다에 들어가고 나이든 해녀들은 얕은 바다에서 물질을 한다. 위험 부담이 적은 곳은 할머니를 위한 ‘할망 바당’인 셈이다. 틈만 나면 할망 바당에서 물질하는 늙은 해녀들을 지켜보았다. 팔순 노인이 거동조차 불편한 몸으로 바다에 들어갔다. 그들의 노동 앞에 나는 부끄러웠다. 나의 게으름을 반성하고 작은 시련에도 움츠러들었던 지난날을 되돌아보았다. 

 

노인들과 지내는 동안 내 삶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럴수록 그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즐거웠다. 제주도의 유명인이나 예술가들과 대화하는 것보다 노인들과 지내는 시간이 내겐 더 좋았다. 제주 사람들의 삶의 비밀이 한 꺼풀씩 벗겨질수록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해졌다. 카메라에 무엇을 담아야 할지 몰라 막막했던 것들이 눈앞에 펼쳐지면서 내 마음을달아오르게 했다. 

 

제주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기 시작하자 무덤이 보이고 동자석도 보였다. 바람과 싸우며 척박한 땅에서 살아온 그들은 무엇을 꿈꾸는가. 유배의 땅에서 변방의 고달픈 삶을 극복하기 위해 토박이들은 ‘이어도’라는 유토피아를 꿈꾸었다. 그러면 ‘이어도’의 실체가 무엇인가. 무덤을 이해하지 않고는 실마리를 풀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무덤을 찍었다. 무덤을 찍다 보니 장례식과 굿판을 기웃거리게 되었다. 무덤을 찾아다니다 오름들을 만났다. 그렇게 나의 제주도 작업은 계속되었다. 

 

작업에 몰입하다 보면 어느 새 탄력이 붙는다. 그러다 예상치 못한 순간 한계에 부딪힐 때가 있다. 내가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지 의문이 생긴다. 확신했던 것들이 불확실로 변하면서 마음이 혼란 속에 빠져든다. 누군가의 조언이 필요하지만 어차피 혼자 가야 할 길이기에 스스로 마음을 다독인다. 그럴 때는 다시 들판으로 나가 노인들을 지켜본다. 시련을 견뎌낸 그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혼란스러움이 사라진다. 

 

제주의 노인들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자기 몫의 삶에 치열하다. 자식들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기 몫의 양식은 스스로 해결하는 노인들은 나에게 답을 가르쳐주었다. 내가 만난 노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크든 작든 한 덩어리의 한을 간직하고 있지만, 묵묵하게 자기 몫의 삶에 열중한다. 온갖 두려움과 불안, 유혹 따위를 극복하고 삶에 열중하는 섬의 노인들은 나의 이정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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