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낭독 가을 - 9

이춘아 2020. 5. 14. 06:12

 

2020. 5.14(목)

 

[체리토마토파이] 

   (베로니크 드 뷔르/이세진 옮김, 2019, 청미)

 

 

가을

 

10월 22일 목요일(저녁)

 

이런 날도 있구나. 세상에, 이런 날을 다 겪어보네. 내가 드디어 침대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한 게 아침 7시경이지 싶다. 페르낭은 내 전화를 받고서 자기 마누라를 걸고 맹세하는데 밤새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고 했다.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간단하게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아래층은 평소와 다른 점이 전혀 없었다. 이중으로 잠가놓은 현관문을 열고 식당의 덧창들도 열었다. 거실의 유리문은 외부에서 억지로 열려고 한 흔적이 없었다. 그들은 집 안까지 들어오지 않았다. 사이렌이 울리니까 도망쳤나 보다. 

 

페르낭이 초인종을 울렸을 때에는 나도 웬만큼 정신을 수습한 상태였다. 심지어 차를 한 잔 따뜻하게 데워서 마실 여유까지 있었다. 차를 마시니 기운이 좀 났다. 페르낭은 벌써 수사를 시작한 참이었다. 그는 ‘우리 동네 셜록 홈스’ 소리를 들을 만한 초동 수사 결과를 내 앞에서 의기양양하게 보고했다. 우리 집 뒤, 그러니까 테라스 쪽에서 타이어 자국을 발견했는데 자기가 보기에는 소형 트럭 타이어인 것 같다고 했다. 동일한 타이어 자국이 오솔길에도 있더란다. 그러면서 다소 어이없는 얘기로 결론을 내렸다. 오솔길 중간쯤, 그러니까 흰 가로대 옆에서 다 쓴 휴지 쪼가리가 발견됐다. 한 장은 분홍색, 한 장은 파란색이었다. 페르낭은 세상에 둘도 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단언했다. “놈들이 완전히 쫄아서 도망도 치기전에 똥을 쌌구먼요! 한 놈은 거시기를 파란색을 닦고 다른 놈은 분홍색으로 닦은 게지요.”

 

10시쯤 마르셀이 2CV를 몰고 와서 나를 동종 경찰서까지 태워줬다. 마르셀의 운전이 미덥지는 않았지만 밤새 한잠도 못 잔 내가 운전대를 잡을 수는 없었다. 경찰서에서 나는 프랑세트가 들었던 말을 그대로 들었다. 아시잖아요. 그런 도둑놈들은 절대 못 잡습니다. 마르셀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더니 페르낭은 경찰들에게 똥 묻은 휴지에 대해서 얘기했는지 그것부터 물었다. 

 

길쭉한 빵 조각을 달걀 반숙에 찍어 먹는 것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진한 커피와 초콜릿 한 조각을 먹었다. 오후에는 자식들과 통화를 하느라 전화기를 오랫동안 붙들고 있었다. 아이들은 왜 휴대전화로 경찰에 전화를 걸지 않았는지 물었고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도 아들딸은 내가 정보 장치 버튼을 바로 누르기를 잘했다고 칭찬해주었다. 자식들은 나보고 용감하다고 했다. 나에 대해서 좀 놀란 것 같다. 

 

질베르트의 전화도 받았다. 나에게 일어난 일을 듣고서 가슴이 철렁했던 모양이다. 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가 앙젤을 만나서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오늘 아침에 앙젤이 우리 집에 왔다가 그때까지도 넋이 빠져 있던 나를 보고 간 참이었다. 그 전화를 끊은 지 한 시간 만에 내가 어젯밤 봉변을 당한 사연이 동네방네 상세하게도 소문이 났다. 친구들이 전부 전화를 했다. 심지어 전직 대령까지 전화를 했다! 나는 내가 오늘의 주인공이다. 페르낭은 내가 좀 괜찮은지, 필요한 것은 없는지 확인하려고 몇 번이나 찾아와 주었다. 마르셀도 내가 잘 있는지 보려고 한 번 더 왔다. 오늘은 나에게 설탕을 달라고 조르지도 않았다. 

 

 

10월 23일 금요일 

 

평온을 되찾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잠은 좀 잤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설마 도둑이 이틀 연속 찾아오진 않겠지. 이제 경보 장치가 있다는 것도 알겠지. 생각하면서도 그들이 소득 없이 돌아갔으니 이번에는 사이렌을 울리지 않고 잠입할 방법을 찾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겁이 났다. 

 

아들딸이 했던 말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솔직히, 사람이 정신이 홀딱 나가니까 누구한테 전화를 건다는 생각 자체를 못하겠더라.... 아니, 그리고 누구에게 전화를 걸 수 있단 말인가? 내가 그저께 밤에 확실히 깨들은 바가 하나 있다면 페르낭에게 도움을 청할 수는 없겠다는 것이다. 페르낭은 자기가 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 요란한 사이렌 소리도 못 들었다고 하지 않는가! 경찰서에 전화를 건다고 해도 문제다. 수상한 사내들이 내 집 테라스를 훔쳐보고 있는 상황에서 아래층에 전화번호부를 가지러 내려가다니... 

 

아들딸은 나에게 ‘경찰서 번호를 단축 번호로 저장’하라고 했다. 경찰서 번호를 저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건 내가 할 줄 모르는 일이다. 말이 난 김에, 그놈의 휴대전화는 또 어디에 뒀더라? 온 집 안을 뒤지고 다니고 냉장고까지 열어봤다. 지금의 내 정신머리로 봐서는 냉장고에서 휴대전화가 나왔도 이상하지 않다. 마침내 차 안에 두고 내린 손가방에서 휴대전화를 찾았다. 라팔리스에 예방 주사를 맞으러 갔다가 여태까지 조수석에 내버려뒀다. 그날 휴대전화 생각이 났어도 어차피 못 썼겠구나! 나는 머리를 싸매고 ‘단축 번호’ 저장하는 법을 연구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포스트잇으로 동종 경찰서 전화번호를 적어서 붙여두었다. 내가 실수 없이 숫자 열 개를 잘 누룰 수 있다면 20분 만에 경찰이 출동할 것이다. 20분이라, 낯선 이가 내 집에 와 있다고 하면 한없이 긴 시간이다.... 

 

휴대전화는 침대머리 탁자에 올려놓고 경보 버튼에 딱 달라붙은 채 누웠다. 불은 끄고 텔레비전은 켰다. 텔레비전이 밤새도록 떠들었다. 몇 미터 옆에서 페르낭과 마르셀이 자고 있다는 사실보다는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나를 더 안심시켜준다. 

 

 

10월 24일 토요일 

 

불행은 절대로 혼자 오지 않는다더니, 오늘 밤부터 시간대가 바뀐다. 서머 타임이 끝나고 이제 윈터 타임으로 넘어간다. 나는 윈터 타임이 싫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날이 금방 짧아지는데! 엎친 데 겹친 격으로, 날씨도 구질구질하다. 오전 내내 비가 왔고 오후 4시밖에 안 됐는데 벌써 밤중 같다. 하늘은 여전히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고 바깥은 전부 축축하게 젖어 있다. 점심을 먹고 불가에서 커피를 마셨다. 서재 방에서 십자말풀이를 풀 때에도 불을 켜야만 했다. 참 안타까웠다. 

 

새벽 3시, 그러니까 이제 새벽 2시가 되겠다. 시계를 한 시간 뒤로 돌려놓아야 한다. 손목시계뿐만 아니라 집 안의 벽 시계들을 모두 손봐야 한다. 복잡하고 성가시다. 시계마다 다 따로 열쇠가 있을 뿐 아니라 문자반을 따라서 큰 바늘 작은 바늘을 돌려서 매시 정각과 삼십 분에 종치는 소리를 다 들어야 한다. 시간이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 하루의 반을 시계에 매달려야 한다. 작은 바늘만 한 시간 뒤로 돌렸다가는 기계 장치 전체가 어긋나버린다. 하지만 오븐 시계는 건드리지 않을 생각이다. 아무 버튼이나 눌렀다가 지난번처럼 깜박깜박 불이 들어오고 오븐이 먹통이 되어 파이 한 판 구우러면 아들이 집에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되어선 안 되니까. 큰 바늘 작은 바늘 없이 큼지막한 숫자로만 시간을 알려주는 모든 것, 다시 말해 전화기, 텔레비전, 영화를 보여준다는 기계, 자동차, 전자레인지, 자명종은 내가 직접 건드리지 않을 작정이다. 안됐지만 할 수 없지. 그것들은 여름을 조금더 누릴 수 있겠다. 아들이나 손자가 오면 한꺼번에 맡겨야지. 그런 건 남자들이 하는 일이다. 기술이 필요한 일이니까. 그리고 난 기술하고는 사이가 안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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