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1920년대의 상해"(1)

이춘아 2020. 6. 13. 05:50


2020.6.13(토)

정정화, [장강일기], 학민사, 1998.

정정화(1900~1991): 1900년 서울에서 태어나 열한 살 나던 해에 대한협회 회장을 지낸 동농 김가진의 아들 김의한과 결혼한다. 21세 되던 해 중국 상해에 망명해 있던 시아버지와 남편의 뒤를 따라 상해로 탈출함으로써 중국에서의 망명생활을 시작한 그녀는 임정밀사의 자격으로 독립운동자금 모금의 밀령을 띠고 지하 조직을 통해 국내에 잠입, 밀령을 수행한다. 1차 국내 잠입 이후 여섯 차례에 걸쳐 국경을 넘나든 그녀는, 1932년 윤봉길 의사 폭탄 투척 사건으로 임정 요인들과 함께 상해 프랑스 조계를 탈출, 망명정부를 뒤바라지하면서 해방되기까지 10여 년 동안 대륙의 피난길을 떠돌게 된다. 중경에서 조국의 해방을 맞으며 그녀는 전쟁 난민이라는 이름으로 조국에 발을 디디었으나 다시 6.25를 겪으면서 남편이 납북되고 가족이 흩어지는 와중에서 부역죄로 구속 기소되어 투옥된다. 40년 세월이 흘러 그녀는 그녀가 겪어온 100년 남짓 쓰라린 세월의 모든 것을 비로소 증언하고, 1991년 한많은 생을 마감한다. 대전현충원 안장됨


“1920년대의 상해”(1)

1923년 7월 나는 다시 상해로 돌아갔다. 시아버님 상을 당할 당시에도 그랬지만 상해에서의 생활이라는 것은 그저 하루 먹고 하루 먹고 하면서 간신히 꾸려나가는 게 고작이었다.식생활이라고 해야 가까스로 주먹덩이 밥을 면할 정도였고, 반찬은 그저 밥 넘어 가게끔 최소한의 종류 한 두 가지뿐이었다. 

상해에는 국내보다 푸성귀가 풍부했다. 미역이나 김 따위는 드물었으나 배추 종류는 다양해서 여러가지 반찬을 해먹을 수 있었다. 사실 배추로 만드는 반찬이 제일 값이 쌌기 때문에 늘 소금에 고춧가루하고 범벅을 해서 절여 놨다가 꺼내 먹곤 했다. 

한가지 특이한 것은 상해에는 잡곡밥이 없고 대부분 쌀밥이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도 살 수 있고, 부자도 살 수 있는 곳이 바로 상해라는 말이 있기도 했다. 동전 한 닢만 가지면 시장에 나가서 국수 튀기고 남은 찌꺼기라도 한 대접씩 받아먹을 수 있었으니 가난한 사람도 살게 마련이었고, 사실은 우리가 그런 축이었다. 

상해에 있는 동안은 한복을 입지 않고 줄곧 짱산이라는 중국 옷을 입고 지냈는데, 임정의 어른들이건 아녀자들이건 모두 그 짱산을 입었다. 그것도 아주 헐값에 천을 사서 만들어 입었는데, 내가 본국을 드나들 때도 신의주까지는 그 중국 옷을 입고, 국내에 들어서서는 싸가지고 갔던 한복으로 바꿔 입곤 했다. 

식생활이나 의생활의 사정이 그러했으니 신발이라고 해서 구두나 운동화 따위의 가죽 고무제품은 엄두도 내지 못할 실정이었고, 고작해야 헌 헝겊 조각을 몇 겹씩 겹쳐서 발 모양을 내고 송곳으로 구멍을 내서 마라는 단단한 실로 촘촘하고 단단하게 바닥을 누벼서 신고 다녔다. 그나마도 살림을 꾸리는 사람이 꽤 바지런하다는 소리를 듣는 집 식구들이나 얻어 신고 다닐 정도고, 그 외에는 짚세기를 끌고 다니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그러니 구두는 고사하고 운동화만 신고 다녀도 일종의 사치에 속했다. 너나 할 것 없이 임정의 그늘 아래 몸 드리우고 사는 사람은 헝겊신마저도 감지덕지할 지경이었다. 

백범같은 분은 여기저기 다니기를 잘 하니까 그 헝겊신의 바닥이 남아날 날이 없었다. 바닥은 다 닳아 너덜거리니 명색만 신발바닥이고 신발 목 부분만 성한 채로 매달려 있는 꼴이었다. 신발도 신발이지만 백범은 그만큼 억척스러운 분이기도 했다. 

이 신발에 대해서 지금도 한편으론 아쉬우면서 기억에 생생한 것은 남경에서 이시영 선생이 내게 구두를 한 켤레 사주신 일이다. 내 공부를 참으로 많이 도와주시고 아껴주시던 분인데, 내가 늘 그 헝겊신만 신고 다니는 게 안쓰러웠는지. 
“나갈 때만 신고 다녀.”
하시면서 구두 한 켤레를 주시던 생각이 지금껏 잊혀지지 않는다. 구두가 하도 귀한 선물이어서도 그랬지만, 선생의 마음이 그대로 고스란히 내게로 온 것만 같아 그 구두를 제대로신고 다니지도 못하고 해방 후 귀국할 때까지 소중하게 건사했건만, 그만 여기까지 와서 6.25 와중에 잃어버리고 말았다. 

상해에서 그토록 형편없는 생활을 근근이 꾸려나가면서도 성엄(남편)은 젊은 동지들과 더불어 항일운동의 하나로 주로 일본인 주요 인물들에 대한 테러 공작을 계획했으나 뜻대로 실천에서도 임정이 있는 프랑스 조계 밖을 나다니는 것도 삼가야 할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까운 시절이었다. 

이제 상해에는 성엄과 나 둘만이 남아 임정의 여러 어른들과 젊은 동지들 사이에서 활동하고, 또 한편으로는 집안 살림을 꾸려나가야 했다. 

1924년 12월에 나는 다섯번째로 본국에 들어오게 됐는데, 이 다섯번째의 본국행에서는 임정의 공적인 임무는 띠지 않았다. 상해의 긴장되고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 휴식을 한 셈이라고나 할까. 이듬해 6월까지 약 6개월간 주로 예산 친정에서 평범한 아낙네의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이 기간 중에도 나는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특히 문학과 역사에 관심을 기울여 책을 늘 손에 잡고 있었는데, 학교 교육의 부족을 메우느라 내 나름대로 무진 애를 썼다. 이 어려운 기간에는 아버님의 뒤를 이어 집안을 꾸려나가는 큰오라버니가 경제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큰오라버니의 됨됨이를 잘 알려 주는 일화의 하나로, 절친한 사이였던 육당 최남선과 하루 아침에 의절을 해 버린 일이 있다. 육당과 오랜 지기 사이였던 큰오라버니는 육당이 변절하여 왜놈에게 협력하게 되자 당장 그와의 연락을 끊고 발길을 안했으며, 심지어 노상에서 육당을 만나더라도 외면한 채 지나치곤 했다. 또한 큰오라버니는 아버님이 작고하자 남작의 작위를 승계할 차례가 되었는데, 끝까지 작위 승계를 하지 않았다. 

평범한 아낙네로서의 친정 생활도 여섯 달로 끝내고 나는 다시 상해로 돌아왔다. 상해에서 성엄이 늘 같이 어울리는 사람 중 특히 가까운 이로는 일가의 숙항이지만 나보다 한 해 아래이며 성엄의 중동중학교 후배이기도 한 시야 김종진이 있었다. 그는 1925년 운남 군관학교를 16기로 졸업했는데, 운남군교 동기생인 김노원과 함께 졸업하던 해에 상해에 와서 반 년을 같이 지냈다. 

시야와 김노원은 거의 우리집에서 살다시피 했다. 두 사람은 나중에 만주로 가서 백야의 휘하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했는데, 시야는 그후 젊은 나이로 아깝게 세상을 떴다. 김노원은 해방이 된 뒤 대전에서 살았는데, 6.25 이전 서울에 올 때마다 꼭 우리 내외를 찾아오곤 했다. 

1926년에 성엄은 영국인이 경영하는 전차회사에 취직했다. 백범이나 석오 이동녕 선생은 상해에 있는 청년들에게 항상 말하기를, 청년들에게 실망을 안겨 줄 수는 없으니 해외든 어디든 가서 배울 수 있는 사람은 배우고, 직장을 가지고 돈을 벌 사람은 벌도록 해서 공부하면서 일하라고 했다. 청년들이 생계 유지를 위해 일정한 수입을 가지면서 자기 앞길을 설계하는 것도 장기적인 독립운동 계획의 하나라고 늘 주장했던 것이다. 

성엄이 취직한 후부터 상해 생활은 비교적 안정되었다. 그때 만주에서는 독립군들의 활동이 활발했으나 상해에서는 활동이 날로 침체되어 가고 있었고, 그럴수록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내분만 늘어나는 형편이었다. 의열단은 본부가 상해로 옮겨온 후에도 테러활동으로 항일 투쟁을 하였다. 

백범은 당시 임정 내무부 경무국장으로 있으면서 역시 테러 투쟁을 개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부터 상해에서의 활동은 주로 참고 기다리는 시기였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은 한편으로 취직하여 생활을 유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입이 보다 나은 사람들은 그 일부를 임정에 내놓기도 하고, 더러는 영도자되는 분의 뒷바라지도 했다. 엄항섭같은 이는 중국 대학교를 졸업했으므로 비교적 수입이 좋았다. 그래서 내무총장 이동녕을 집에서 모시고 지내면서 내무부 및 경무국의 경비도 많이 부담했다. 

성엄의 수입은 적었으므로 남에게 이렇다할 도움을 줄 수는 없었다. 그러면서도 한때는 중국 본부 한인청년동맹 상해지부의 재정간사를 맡기도 했으며, 본부의 상임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그때 상해지부의 위원장은 조한용이었으며, 조시원, 무정 등이 조직의 주요 간부로 활동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정은 그후 상해를 떠나 중국공산당에 가담했고, 아주 유명한 인물이 된 것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다.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처음의 기대와는 달리 미국 등은 우리의 독립운동에 극히 냉담하게 대하였다. 유독 소련만이 적극적으로 지원했으며, 레닌은 임시정부에 거금을 보내주기까지 했다. 이에 힘입어 1920년에 이미 상해에서 고려공산당이 창설되었다. 

그러나 고려공산당은 그때만 해도 소련혁명을 동경한 일부 사람들의 집단이었을 뿐 제대로 공산주의를 이해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중국에 공산주의 사조가 퍼져가게 되었고, 한인 사회에도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며,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사람들도 점차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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