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폭풍우 속에서도 태양은 떠오른다"

이춘아 2020. 6. 7. 05:25

2020. 6.7(일)

김영갑 사진.글, [그 섬에 내가 있었네], human & books, 2004


“폭풍우 속에서도 태양은 떠오른다”


수평선에 태양이 나타나기 전 들판으로 바다로 나가 해가 떠오르길 기다린다. 그리고 태양이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땅거미가 짙어지면 카메라를 챙긴다. 그것이 하루의 시작이자 끝이었던 때가 있었다. 샐러리맨들이 직장으로 출근하듯, 비가 오든 눈이 오든 하루도 빠짐없이 카메라를 둘러메고 집을 나섰다. 사진가인 나는 그렇게 태양의 변화를 지켜보며 들판에서 바다에서 젊음을 떠나보냈다. 몸이 아파 제주도를 떠나 있을 때에도 폭풍우와 눈보라가 몰아칠 때에도, 태양은 수평선 위로 떠올랐다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태양은 늘 그랬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그랬고, 내가 죽은 뒤에도 그럴 것이다. 

서울의 한 대학 병원에서 루게릭 병진단을 받고도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머릿속이 텅 비어 과거도 미래도 사라졌다. 루게릭 병이라는 현실만이 부각되었다. 행복은 불행 뒤로 사라져 흔적조차 없었다. 폭풍이 몰려왔다. 태양의 기억도 사라졌다. 

나는 자연이 주는 메시지를 통해 영혼의 구원을 꿈꾸었다. 자연의 품에서 보고 느끼고 깨달으며 영혼의 자유를 꿈꾸었다. 이십 년 세월 동안 자연의 품안에서 뒹굴었기에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행복과 불행의 중심에 서 있지 못하고 어느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진 부조화의 삶에 빠져 있었다. 행복할 때 불행을 대비한다고 노력했지만, 공염불로 끝이 났음을 루게릭 병이 가르쳐주었다. 행복과 불행을 자유로이 오갈 수 있는 마음자리를 닦는다고 내 자신을 무던히도 들볶았는데, 그동안의 마음공부는 한밤중의 잠꼬대였다. 

늘 마음의 준비를 하고 살아왔지만 불행이 현실로 다가오자 어이가 없었다. 예상보다 빨리 다가온 불행에 슬픔조차 느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당황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어안이 벙벙했을 뿐이다. 

폭풍우 속에서도 태양이 떠오른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다만 태양이 보이지 않으니 잠시 잊고 있을 뿐이다. 행복할 때 잠시 잊고 있는 것이다. 불행을 그림자처럼 달고 다니면서도 나는 불행이 아주 멀리 있는 것이라고 착각했다. 

태양이 구름을 숨어버리면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그림자가 보이지 않으면 그림자를 잊어버린다. 건강할 때 건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행동으로 실천하지 못했다. 건강을 위해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몸을 혹사시키면 어떤 결과가 올지 많은 사람들이 충고했지만 나는 무시했다. 자청해서 병을 불러들인 것이다. 건강의 중요함을 알면서도 몸을 돌보지 않은 결과이다.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이 너무도 여리다. 

궂은 날에도 들판으로 바다로 나가 태양을 보았다. 그때마다 행복 뒤에 숨어 있는 불행을 생각하며 하루를 열심히 살자고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도망칠 수 없는 절망 앞에 서 있게 될 때를 위해 하루를 신명 나게 즐겼다. 미련이나 후회가 없도록 하나에 몰입했다. 절망 앞에서 웃을 수 있도록 늘 준비하고 있었다. 

죽음을 피해갈 수 없다면, 웃으면서 떠나갈 수 있도록 죽기를 각오하고 하나에 매달렸다. 절망 앞에서 여한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나는 동요하고 있었다. 분명 흔들리고 있었다.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예상보다 훨씬 빨랐기에 어이가 없었다. 슬픔도 느끼지 못했다. 평상심을 잃었다. 

이십대에 자살을 시도한 후 늘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불안도 없었다. 내겐 친숙한 단어였으며, 웃으면서 맞을 수 있는 순간일 거라고 생각했다. 목숨이 붙어 있는 모두가 피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웃으면서 맞이하자, 웃으면서 더나가자. 그때를 위해 아낌없이, 신명 나게 살아 있음을 즐기자.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아름다운 것만 보고 생각하고 느끼며, 세상의 삶을 아름답게 채색하며, 내 삶을 아름답게 가꾸자.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잊기 위해 노력했다. 평상심을 유지하기 위해 태양이 뜨기 전부터 일어나 하루를 시작했다. 카메라를 잡을 수 없으니 사진 대신 하루를 즐겁게 보낼 수 있는 소일거리를 찾았다. 그것이 바로 사진 갤러리를 꾸미는 일이었다. 하나에 몰입해 있는 동안은 평상심을 잃지 않았고 잠자리도 편안했다. 

몸은 점점 굳어가도 해야 할 무엇인가가 있는 하루는 절망적이지 않다. 설레는 가슴으로 내일을 기다리면 하루가 편안하게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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