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램, [찰스 램 수필선](김기철 번역), 문예출판사, 1976.
찰스 램(Charles Lamb, 1775~1834) : 영국의 수필가이자 시인, 필명 엘리아. [엘리아 수필집]은 영국 수필 최고의 걸작으로 불린다.
“돼지 구이를 논함”(1)
어느 날 아침 돼지치기 호티란 사람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돼지에게 먹일 도토리를 주워오려고 숲속으로 가면서 오막살이집을 큰 아들인 보보에게 지키라고 했는데, 그 녀석이 아주 칠뜨기여서 고 또래의 아이 녀석들이 좋아하는 불장난을 하다 불똥을 짚단에 튀게 하는 바람에 순식간에 불이 확 퍼져, 그 알량한 오두막집을 홀딱 태워먹으니, 결국 몇 줌 안되는 재만 남게 되었다. 그 오두막(건물이라고는 하지만 노아의 홍수 이전의 한심스런 임시 움막쯤이라고나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과 운명을 같이해서, 집보다 더 중요한 것, 즉 갓 낳은 한 배의 예쁜 새끼 돼지 아홉 마리도 모두 요절하고 말았다.
돼지는 우리가 책에서 읽은 바에 의하면 까마득한 옛날부터 동양 어디에서나 귀중품으로 소중히 여겨왔다. 짐작할 수 있을 테지만, 보보 녀석은 하늘이 노랗게 보일 정도로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그것은 집을 태워먹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까짓 집이야 마른 나뭇가지 몇 개로 아버지하고 한 두어 시간 꿈적꿈적하면 누워서 식은 죽 먹기로 어느 때고 지을 수 있는 것이었으나, 문제는 돼지를 망쳐놓은 것이었다.
아버지한테 뭐라고 변명을 할까 생각하며, 그 비명횡사한 새끼 돼지의 연기가 피어오르는 잔해를 내려다보고 손을 마주 비비는데, 무슨 냄새가 콧구멍을 찔렀다. 그러나 그 냄새는 아직 한번도 맡아본 일이 없는 그런 냄새였다. 어디서 나오는 냄새일까? 타버린 오막살이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고 - 그 냄새는 전에 맡아본 일이 있으니까 - 사실 이것은 그 재수가 나쁜 어린 방화범이 부주의해서 일으킨 사고 중의 제일 첫 사고는 아니었다. 그 냄새는 이미 알고 있는 나물이나 잡초나, 꽃향기하고는 같은 데가 조금도 없었다. 동시에 무언가를 미리 알려주는 군침이 그의 아랫입술을 흥건히 적셨다.
녀석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다음에 돼지한테 무슨 생명의 기운이 있나 싶어, 몸을 굽히고 만져보았다. 그런데 녀석은 손가락을 데어 그 덴 손가락을 식힐 양으로 밥통마냥 그것을 입으로 가져갔다. 불에 그슬린 가죽 조각이 손가락에 묻어 있었던 탓에 보보는 난생 처음 그 맛을 보게 되었다. 그 바삭바삭하는 돼지 가죽 맛을! 또다시 녀석은 돼지를 만지고 주물럭거렸다. 이번에는 뭐 별로 데지도 않았는데, 일종의 버릇처럼 손가락을 햝아댔다. 마침내 그 느려터진 둔한 골통이 진상을 깨달았다. 그렇게 냄새를 풍긴 것이 다름 아닌 돼지였다는 것과 그렇게 맛이 좋았던 것도 돼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 만난 재미에 정신이 팔린 녀석은 불에 탄 가죽과 거기 붙은 살점을 한줌 두둑이 찢어내어, 짐승이 먹는 식으로 목구멍에다 잔뜩 우겨 넣었다. 바로 이때 녀석의 아버지가 혼을 내주려고 몽둥이를 거머잡고 연기 나는 서까래 사이로 들이닥쳐, 일이 이쯤 돼 돌아가는 것을 발견하고, 피도 안마른 망나니 녀석 어깨에다가 몽둥이찜질을 시작했다.
그렇지만 보보 녀석은 이런 지독한 몽둥이 세례를 파리가 기어 다니는 정도로 무시해버렸다. 녀석이 아랫배 있는 데서 맛보는 간질간질한 쾌감은, 제 몸뚱이 먼 구석에서 느껴지는 불편 정도는 전혀 무감각하게 해놓았다. 아버지는 계속해서 두들겨 팼지만, 아무리 때려도 녀석이 깨끗이 먹어치울 때까지는 돼지한테서 떨어져 나가게 할 수 없었다. 이윽고 녀석이 제 처지를 어느 정도 알아차리게 되어서야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고가게 되었다.
“ 이 버르장머리 없는 자식아, 대체 무엇을 해 처먹는 게냐? 망나니 버릇을 못 버리고 집을 석 채씩이나 불살라먹고도 모자라냐? 이 벼락을 맞을 놈! 네놈이 불을 처먹고 있는 게 아니냐? 나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거기서 처먹는 게 뭐냔 말이다!”
“아이고, 아버지, 돼지예유, 돼지! 와서 불탄 돼지 맛이 얼마나 좋은지 맛이나 좀 보시라니까유.”
호티의 양쪽 귀는 공포로 왱왱 울렸다. 그는 아들을 저주하고, 불에 탄 돼지를 먹는 자식을 낳은 자신을 또한 저주했다.
아침부터 놀랍게도 후각이 날카로워진 보보는 금방 또 한마리의 돼지를 끌어 잡아당겨서, 완전히 두 동강 나게 찟더니 작은 쪽 반을 강제로 호티의 손아귀에다 밀어 넣으면서, 여전히 왜첬다. “잡숴봐요, 잡숴봐. 아버지 불탄 돼지를 잡숴봐유. 맛만 보시라니까요. 아이 참!” 이렇게 야만인처럼 소리를 지르면서 숨이 막힐 것 같은데도 줄곧 쑤셔 넣었다.
호티가 이 망측스런 물건을 움켜잡고 있으려니까 뼈마다라는 뼈마디는 죄다 왈각거리는 것 같았다. 아무리 제 자식이지만 이 해괴한 어린 괴물을 죽여버려야 하지 않을까 망설이고있는 동안에, 아들 녀석과 똑같은 연유로 불탄 돼지 가죽에 그슬린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댐으로써 이번에는 아버지가 그 맛을 보게 되었다. 아버지가 아무리 입을 버려놨다는 표정을 만들어 지으려고 해도, 그 맛이 아주 싫은 것이 아님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결국에 가서는(사본에는 이 대목을 지루하게 늘어놓았지만) 두 부자가 정식으로 한 상 차리고 앉아, 남은 찌꺼기까지 싹 먹어치우고 난 다음에야 일어났다.
보보는 이 비밀을 절대로 입밖에 내서는 안 된다고 단단히 명령을 받았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내려주신 맛좋은 고기보다 더 맛있게 먹을 생각을 할 수 있었던, 이 못된 놈들을 이웃 사람들이 돌로 쳐죽이려 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이상한 이야기가 떠돌았다. 호티의 오두막집이 그전보다 뻔질나게 불이 난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이때부터는 온통 화재였다. 어떤 때는 밤중에 났다. 암퇘지가 새끼를 낳기가 무섭게 호티의 집은 화염에 싸였다. 그리고 더욱 명백해진 사실은 호티가 아들을 매질하는 대신, 전보다 훨씬 더 멋대로 하게 내버려둔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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