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리 앤 섀퍼, 애니 배로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신선해 옮김), 비전비엔피, 2018.
도시(Dawsey)가 줄리엣(Juliet)에게
1월 31일
친애하는 애슈턴 양,
보내주신 책이 어제 도착했습니다! 참 친절한 분이군요.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저는 세인트피터포트 항구에서 일합니다. 배에서 짐을 내리는 일이지요. 그래서 휴식 시간에 책을 읽을 수 있어요. 버터 바른 빵과 진짜 차를 맛볼 수 있고 이제 당신에게 받은 책까지 있으니 이거야말로 축복입니다. 표지가 딱딱하지 않아서 어딜 가든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으니 더 좋습니다. 물론 너무 빨리 읽지 않게 조심할 겁니다. 찰스 램의 초상화도 생겼으니 이 또한 소중한 일입니다. 그는 머리숱이 많았군요, 그렇죠?
물론 당신에게 답장 쓸 시간은 충분합니다. 그럼 질문하신 내용에 최선을 다해 답해보겠습니다.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는 재주가 그리 뛰어난 편은 아니지만요. 먼저 돼지구이 파티에 대해 말씀드리죠.
저에겐 아버지가 물려주신 농장과 집이 있습니다. 전쟁 전에는 돼지를 치고 채소를 길러서 세인트피터포트 시장에 팔고 런던 코번트가든에 꽃을 팔았죠. 목수 일과 지붕 고치는 일도 가끔 했고요.
지금은 돼지를 치지 않습니다. 독일군이 유럽 대륙에 주둔한 군인들에게 먹이려고 다 가져갔어요. 저에겐 감자를 기르라더군요. 그들이 하라면 하고 말라면 말아야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러니까 제가 독일군에 대해 잘 몰랐을 때는 돼지 몇 마리쯤은 혼자 몰래 기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농업 담당 장교한테 들켜서 다 몰수당했지요. 뭐, 꽤 타격을 입긴 했습니다만 저는 잘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감자와 순무는 충분했고 그때까지는 밀가루도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이상하게도 사람 마음이 어찌나 음식에 휘둘리던지, 순무를 주식으로 먹고 이따금 별식이랍시고 연골 덩어리를 씹으며 6개월을 보내고 나니 머릿속에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이 간절해지더군요. 제대로 갖춰진 식사 말입니다.
어느 날 오후, 이웃에 사는 모저리 부인이 저에게 쪽지를 보냈습니다. 빨리 오라고 적혀 있었어요. 그리고 푸줏간 칼을 가져오라고요. 저는 괜한 기대를 품지 않으려고 애쓰면서도 단숨에 그녀의 장원 저택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괜한 기대가 아니었어요! 모저리 부인에게 남몰래 빼돌려둔 돼지가 있었고, 친구들과 함께할 돼지고기 파티에 절 초대한 겁니다!
어릴 때 저는 말수가 적은 편이었습니다. 말을 심하게 더듬었거든요. 게다가 파티 같은 데도 별로 참석한 적이 없었습니다. 진실을 말씀드리자면, 저를 파티에 초대한 사람은 모저리 부인이 처음이었습니다. 돼지구이를 맛볼 생각에 그 초대에 응했습니다만 실은 고깃덩이를 몇 조각 얻어 집에서 혼자 먹을 작정이었습니다.
그 계획대로 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바로 그 파티가 건지 섬의 감자껍질파이 문학회 첫 모임인 셈이었으니까요. 당시엔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지만 말입니다. 음식도 좀처럼 맛보기 힘든 진미였지만 사람들은 더더욱 훌륭했습니다. 신나게 먹고 이야기하느라 모두 시간 가는 줄 몰랐지요. 그러다 아멜리아(모저리 부인의 이름입니다)가 9시를 알리는 시계 종소리를 들었습니다. 야간 통금 시간에서 두 시간이나 지난 겁니다. 뭐, 배불리 먹고 배짱이 두둑해진 탓일까요. 엘리자베스 매케너가 밤새 아멜리아의 집에 숨어 있을 게 아니라 당당하게 나가서 각자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을 때 모두가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통금을 어기는 건 범죄 행위였어요. 실제로 수용소로 끌려간 사람들 얘기도 들었으니까요. 하물며 돼지를 숨기는 건 더 큰 범죄였기 때문에, 우리는 최대한 소리를 죽이며 들판을 살금살금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존 부커 때문에 그만 일이 틀어졌습니다. 파티에서 음식보다 술을 더 마시더니만 우리가 도로에 닿자마자 정신을 놓고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른 겁니다! 제가 즉시 그를 붙잡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독일군 순찰 대원 여섯명이 숲 속에서 튀어나오더니 기관총을 겨누며 고함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통금 시간에 왜 나돌아다녀?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지? 어디로 가는 중이야?
저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도망가면 그들이 저를 쐈을 겁니다. 그 정도는 분명히 알고 있었지요. 입이 분필처럼 바싹 마르고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습니다. 그저 부커를 붙잡은 채 헛된 희망에 기댈 수밖에요.
바로 그때 엘리자베스가 심호흡을 하더니 앞으로 나섰습니다. 엘리자베스는 키가 작아요. 그래서 총구가 그녀의 눈앞에 늘어서 있었는데도 그녀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습니다. 마치 총을 전혀 보지 못한 듯 행동했습니다. 그녀는 순찰대 대장에게 다가가서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빨간 거짓말이었지요. 통행금지령을 어겨서 정말 죄송합니다. 건지 섬 문학회 모임이 있었어요. 오늘은 [엘리자베스와 그녀의 독일식 정원]에 대해 토론했는데 정말 유쾌한 시간을 보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책이죠. 혹시 읽어보셨나요?
우리 중 누구도 감히 그녀를 거들 엄두조차 내지 못했는데, 순찰대 대장에겐 그 정도로도 충분했습니다. 그는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답니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사람입니다. 대장은 우리 이름을 적고는 다음 날 아침 사령부로 출두해 달라고 아주 정중하게 요청했습니다. 그런 다음 우리에게 목례하며 잘 가라는 인사까지 했습니다. 엘리자베스가 최선을 다해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우리는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습니다. 겁먹은 토끼가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요. 저는 부커를 질질 끌다시피 하면서도 재빨리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돼지구이 파티 이야기입니다.
저도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세인트피터포트 항구에는 물자를 실은 배가 매일 들어오지만 건지 섬에는 아직도 필요한 게 많습니다. 식료품, 옷, 씨앗, 농기구, 동물 사료, 공구, 의약품,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게 바로 신발입니다. 그나마 이제 음식 걱정은 덜었으니까요. 전쟁이 끝날 즈음 이 섬에는 제대로 맞는 신발이라곤 한켤레도 남지 않았을 겁니다.
섬으로 들어오는 물품 중에는 오래된 신문지와 잡지 낱장으로 싼 것들이 있습니다. 저와 제 친구 클로비스는 그런 신문지와 잡지를 잘 펴서 집으로 가져와 읽습니다. 다 읽은 다음에는 우리처럼 지난 5년간의 바깥세상 소식을 궁금해하는 이웃들에게 전해줍니다. 뉴스나 사진만이 아닙니다. 소시 부인은 요리법이 나온 부분을 읽고 싶어 합니다. 마담 르펠은 패션 기사를 원하고(재봉사거든요), 브루어드 씨는 부고란을 열심히 살핍니다(어떤 사람의 부고 소식을 기다리는 듯한데, 그게 누구인지는 절대 밝히지 않아요). 클로디아 레이니는 로널드 콜먼(1920년대부터 제2차 세계대전 후까지 활동한 미국 영화배우)의 사진을 애타게 찾습니다. 투텔 씨는 수영복 입은 미녀들 사진을, 제 친구 이솔라는 결혼식 기사를 좋아합니다.
전쟁 중에도 우리는 알고 싶은 것이 무척 많았지만, 영국 본토는 물론이고 세계 어느 곳에서도 신문이나 편지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1942년에는 독일군이 무선 라디오도 모두 압수했습니다. 물론 몰래 숨겨두고 듣기도 했지만 만에 하나 발각되는 날엔 수용소로 보내질 수도 있었지요. 그래서 요즘 접하는 신문이나 잡지를 읽다 보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너무도 많습니다.
저는 전쟁 당시의 만화를 즐겨보는데, 그중 한 편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1944년에 에 실린 만화로, 사람들 열 명 정도가 런던 거리를 걷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인공은 서류 가방과 우산을 들고 중산모를 쓴 두 남자인데, 한 명이 다른 한 명에게 “두들버그가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다니, 웃기는 소리야”라고 말합니다. 몇 초 더 들여다보자니 만화 속 인물들이 하나같이 한쪽 귀는 정상인데 다른 쪽 귀는 굉장히 크게 그려져 있더군요. 당신이라면 이게 무슨 뜻인지 설명해주실 수 있겠지요.
진실한 마음을 담아, 도시 애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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