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리 앤 섀퍼, 애니 배로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신선해 옮김), 비전비엔피, 2018.
아멜리아(Amelia)가 줄리엣(Juliet)에게
2월 18일
친애하는 애슈턴 양,
저의 염려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줘서 고마워요. 어젯밤 문학회 모임에서 당신의 칼럼 이야기를 했어요. 칼럼에 찬성한다면 자신이 읽은 책과 독서에서 찾은 즐거움에 대해 편지를 써서 당신에게 보내라고 제안했고요.
반응은 폭발적이었어요. 문학회의 회장인 이솔라 프리비가 조용히 하라며 의사봉을 두드릴 정도였답니다(하긴 이솔라는 누가 부추기지 않아도 의사봉 두드리는 덴 선수죠). 곧 당신에게 편지가 많이 갈 거예요. 당신이 쓸 칼럼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우리 문학회의 설립 배경은 도시(Dawsey)에게 들으셨죠? 돼지구이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이 독일군에게 체포되지 않게 꾀를 쓴 거라고요. 우리 집에서 열린 파티에는 도시, 이솔라, 에번 램지, 존 부커, 윌 시스비, 그리고 우리의 사랑스러운 엘리자베스 매케너가 참석했어요. 독일군 코앞에서 즉석으로 이야기를 지어낸 그 아이 말이에요. 그녀의 재빠른 기지와 빛나는 말솜씨에 감사할 따름이랍니다.
당시에 저는 물론 그들이 곤경에 처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어요. 손님들이 떠나자마자 서둘러 지하창고로 내려가서 저녁 식사 흔적들을 묻느라 바빴거든요. 문학회 이야기를 들은 건 다음 날 아침 7시였어요. 엘리자베스가 우리 집 주방으로 와서는 “집에 책이 몇 권이나 있어요?”라고 묻지 않겠어요?
우리 집엔 책이 꽤 많았지만 엘리자베스는 책장을 훑어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어요.
“더 필요해요. 여기는 원예 서적만 너무 많잖아요.”
당연히 그럴 수밖에요. 저는 훌륭한 원예 서적을 정말 좋아하거든요.
엘리자베스가 말했어요.
“이제부터 우리가 뭘 할 거냐면요. 사령부에서 조사가 끝나는 대로 폭스 서점에 가서 책을 살 거예요. 문학회 회원이 되려면 문학 애호가처럼 보여야죠.”
저는 오전 내내 안절부절 못했어요. 사령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걱정이 되어 미칠 지경이었죠. 결국 그들 모두 건지 감옥에 갇히면 어쩌지? 또는 최악의 상황이 되어 유럽 대륙에 있는 포로수용소로 간다면? 독일군의 법 집행 기준은 항상 제멋대로라 어떤 판결을 내릴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어요.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요.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독일군은 채널제도 주민들에게 예술과 문화활동을 허락했을 뿐 아니라 장려하기까지 했어요. 그들의 목적은 독일군이 모범적으로 통치한다는 사실을 영국군에게 입증하는 것이었지요. 그런 뜻이 어떻게 외부 세계로 전달될 것인지는 아무런 설명도 없었어요. 건지 섬과 런던을 잇는 전화와 전신은 1940년 6월 독일군이 상륙한 바로 그날 끊어졌는데 말이죠. 독일군의 속셈이야 어쨌건 간에 채널제도는 유럽의 다른 독일군 점령지에 비해 훨씬 관대한 통치를 받았어요. 최소한 초기에는 그랬어요.
사령부에서 친구들은 벌금을 조금 내고 문학회 이름과 회원 명단을 제출하라는 명령을 받았어요. 사령관은 자기도 문학 애호가라면서 언젠가 자기랑 뜻이 맞는 장교 몇몇과 함께 모임에 참석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대요.
엘리자베스는 무조건 환영이라고 대답했지요. 그다음 그녀와 에번과 저는 폭스 서점으로 뛰어가 새로 설립된 문학회에서 읽을 책을 한 아름 사들고 우리 집으로 돌아와 책장 선반에 꽂았어요. 그리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려 노력하며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면서, 그날 저녁 우리 집에 와서 책을 한 권씩 골라 읽어야 한다고 일렀답니다. 마음은 급해 죽겠는데 여기저기 서서 잡담을 하며 천천히 걷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요! 타이밍이 생명이었어요. 엘리자베스가 겨우 2주후로 잡힌 다음번 모임에 사령관이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겁을 줬거든요(그는 오지 않았어요. 그 후 몇 년 동안 독일군 장교 몇몇이 참석하긴 했지만 다행히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돌아가더니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지요).
그렇게 해서 시작된 거예요. 저는 회원 모두를 알았지만 그렇게 잘 아는 건 아니었어요. 도시와는 30년 넘게 옆집에 살면서도 날씨나 농장 일에 관한 것 말고는 딱히 대화를 나눈 적도 없었답니다. 이솔라나 에번과는 친하게 지냈지만 월시스비와는 안면만 튼 사이였죠. 존 부커는 거의 모르는 사람이나 다름없었어요. 그는 독일군이 오기 직전에 이사 왔거든요.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사람은 엘리자베스뿐이었어요. 그녀가 부추기지 않았다면 저는 돼지구이 파티에 그들을 부르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랬다면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도 탄생할 수 없었겠죠.
그날 저녁 문학회 회원들은 우리 집에 와서 읽을 책을 골랐어요. 성경이나 종자 안내 책자, 외에는 글을 거의 읽어본 적 없는 사람들이었죠. 도시가 찰스 램을 발견하고 이솔라가 [폭풍의 언덕]에 폭 빠진 것도 바로 이때 시작되었답니다. 저는 [픽웍 페이퍼스](찰스 디킨스의 첫 장편소설)를 골랐어요. 읽으면 기분이 좋아질까 싶어 골랐는데 과연 잘 골랐더군요.
그리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 책을 읽었지요. 모임이 시작되었어요. 처음에는 사령관이 올 때를 대비한 것이었고, 그 후로는 우리가 즐거워서 모였답니다. 우리 중 누구도 문학회란 걸 경험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 나름의 규칙을 정했어요. 읽은 책에 대해 돌아가며 발표하기로 했지요. 시작할 때는 조용히 경청하고 객관성을 잃지 않으려 애썼지만, 곧 분위기가 바뀌고 발표자의 목적은 자기가 읽은 책을 다른 회원들도 읽고 싶게 부추기는 쪽으로 흘러갔어요. 한번은 두 명이 같은 책을 읽고 논쟁을 벌였는데 그러니까 굉장히 즐겁더라고요. 우리는 책을 읽고 책에 관해 이야기하고 책을 놓고 토론하면서 점점 더 가까워졌어요. 섬의 다른 주민들도 문학회에 가입하고 싶어 했고 우리 모임은 그야말로 활기차고 유쾌한 시간이 되었죠. 때때로 어두운 현실을 거의 망각할 정도로요. 요즘도 2주에 한 번씩 모인답니다.
우리 문학회 이름에 ‘감자껍질파이’가 들어간 건 윌 시스비 때문이에요. 그는 먹을 게 없는 모임에는 결코 가지 않아요. 독일군이 오라고 해도 거절할걸요! 그래서 우리 모임에 다과가 추가되었지요. 당시 건지 섬에는 버터와 밀가루가 부족하고 설탕은 아예 없었기 때문에 윌이 감자껍질파이를 만들었어요. 으깬 감자를 소로 넣고 비트 즙으로 단맛을 내고, 감자껍질을 파이껍질로 사용했지요. 윌의 조리법은 대개 미덥지 않지만 그 작품은 성공작이었어요. 답장 기다릴게요. 당신의 칼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궁금하네요.
진실한 마음을 담아, 아멜리아 모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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