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 편지'
환상. 영어로는 fantasy, 독어로는 Phantasie, 불어로는 fantaisie라고 쓴다. 그런데 이 곡은 이들 중 무엇도 아닌 다른 철자를 쓴다. 슈만의 피아노곡, 다. 우리나라 말로는 ‘환상곡’으로 번역되는 이 단어는 그래서 로베르트 슈만이 남긴 고유명사다.
어느 날 그는 베토벤 기념비의 건립 기금을 마련하려는 동료 프란츠 리스트로부터 작품을 의뢰받았다. 맨 처음 그가 작곡하고자 했던 것은 ‘소나타’였다. 짧은 ‘성격소품’들을 묶은 모음곡을 주로 쓰던 그가 3악장 형식의 소나타에 도전했다는 것 자체가, 고전 소나타의 대가 베토벤에 대한 존경심의 표현이었을 수 있겠다.
하지만 막상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하자, 곡의 주제부터 내용까지 모든 게 달라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스승의 딸 클라라와 불같은 사랑에 빠진 그에게, 세상은 밤하늘의 해와 달부터 떨어져 내리는 빗방울까지 온통 그녀였으니. 제자로서는 무한히 아꼈을지언정 딸을 내어줄 마음은 추호도 없었던 프리드리히 비크는 두 사람을 떼어 놓기 위해 클라라를 저 멀리 파리로 보내버렸다.
만나는 것은 고사하고 서신을 교환하는 것까지 힘들어진 이 불쌍한 연인이 이제 사랑을 포현할 수단이라곤 오로지 음악뿐. 쉴레겔의 4행시, ‘은밀히 귀 기울이는 자에게/ 온갖 대지의 꿈속에서/ 나지막한 음이/ 모든 음을 뚫고 울려나온다’를 앞머리에 붙인 이 곡을 클라라에게 보내며, 슈만은 말미에 이렇게 적었다. ‘그 나지막한 음, 그건 바로 당신’. 이렇게 이 곡은 은밀한 편지가 되었다.
슈만 스스로가 자신이 이때까지 지은 곡 중 가장 열정적이라 표현한 1악장은 왼손의 아르페지오(화음을 펼쳐서 연주하는 것)로 시작한다. 베이스인 첫 음은 솔, 두 번째 음은 라, 둘의 간격은 사실상 2도다. 하지만 두 음은 나란히 모여 있는 대신, 사이에 한 옥타브를 두고 떨어져버렸다. 가장 가깝고도 먼 사이가 된 것이다.
p(피아노, 작게)로 숨을 죽인 왼손이 무색하게 이내 오른손의 선율이 ff(포르티시모, 아주 세게)로 등장한다. 일곱 마디 내내 거침없는 어조로 노래하는 동안 왼손은 똑같은 베이스 솔을 계속 유지한다. 어떤 것에도 괘념치 않는 그의 마음과 어떻게 해도 가질 수 없는 그녀... 오른손이 작게 속삭이기 시작하자 그제야 베이스도 라로 한 음 올라가 단조 화성을 만들고 그 불안감에 동조한다. 서로 주저하는 듯한 리타르단도(점점 느리게)를 거쳐 다시 처음 주제로 돌아 온 선율에, 이번에는 트릴(연속 꾸밈음)이 더해진다. 처음에는 그모양새가 사랑을 속삭이는 새의 지저귐같이 고요하지만, 점차 그 폭이 커지고 이내 광기로 치닫는다.
자꾸만 엇갈리는 환상과 현실처럼, 함께 있지 못하는 연인처럼, 오른손과 왼손은 계속 당김음을 주고받는다. 41마디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같은 선율을 노래하는 양손. 애타지만 절대적인 하나의 선율. 정확히는 왼손의 내성까지 합쳐 세 성부가 같은 선율을 놓지 않는다. 다시금 잠시 엇갈리는가 싶다가 제2주제에 도달한 양손은 드디어 장조의 선율, 사랑의 노래를 부른다. 오른손 선율을 왼손이 따라, 왼손을 오른손이 또 따라... 그러다 노래하기를 갑자기 멈춘 양손은 74마디에서 미플랫 음 하나만을 남긴 채 파편처럼 흩어진다. 하나 남은 그 음은 바로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모든 음을 뚫고 들려오는 나지막한 음’. 그리고 이것은 이내 기타의 아르페지오를 연상시키는 왼손의 화음으로 바뀌고, 그때 이것을 반주삼은 오른손이 느닷없이 허공에 구름으로 세레나데를 새긴다. “난 정말 당신뿐이야!”
그런데 이런 노골적인 1악장보다 클라라의 마음을 더욱 사로잡은 것은 2악장이었다. 전형적인 게르만의 행진가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 폭발하는 사랑의 감정 하나하나를 쏟아낸 이곳을 받고 클라라는 “8~16마디에서 내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았어”라며 화답했다.
진정한 ‘환상’은 3악장에서 그렸다. 앞 두 악장에 각각 ‘폐허’와 ‘승리’로 소제목을 붙인 그는 이 3악장에 ‘빛나는 왕관’이라 이름 붙였다.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다시금 같은 선율을 노래하게된 양손은 결국 축복 속에 당당히 행진가를 제창하고, 이윽고 서로에게 완전히 어우러져 꿈의 세계로 빠져들며 곡은 끝난다. 초고에서는 이 마지막 부분에, 1악장 마지막 부분이 다시 한 번 더 나온다. 갑자기 재등장하는 이 오른 손 선율은 베토벤의 가곡, 의 선율을 인용한 것이다.
그러나 슈만은 출판을 위해 이 곡의 몇군데를 수정하면서 3악장의 이 부분을 잘라내버렸다. 결국은 그가 맞았다. 이듬해에 마침내 클라라와 결혼에 골인했고, 마지막 순간까지 멀리가 아닌 그녀의 ‘가까이’에 남았으니까. 이 곡은 이렇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 편지, 그들만의 ‘Fantasie’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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