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성균의 고향 마을을 찾아
이춘아
석달 가까이 고사리들이 함께 읽었던 [누비처네]의 작가 목성균의 고향을 찾아갔다. 웃음꽃으로 피어나는 고사리들이 연풍에 도착하여 찾아간 ‘유상리’. 그곳에서 이미 유명을 달리한 작가의 동갑내기 친구였던 할머니를 만났고, 서너살 아래인 할아버지도 만나 작가가 살았던 집을 찾아갔다. 다리 난간에 앉아 꽤 오랜 시간 할머니로 부터 이야기를 들었다. 그 집안이 이 동네에서는 대단한 집이었고, 작가의 아버지가 면장 조합장을 지낸 유지였고, 그 아버지의 성화로 당시 ‘마을만들기’ 사업으로 큰 상을 타기도 했다 하였다. 글에서도 그 느낌은 있었지만, 작가는 마음이 따뜻하고 착한 사람이었음을 동갑내기 여자친구로부터 확인한다. 배다른 형제가 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구박을 받을때도 늘 감싸주었다고 했다. 사람에 대한 인상이 오래 남는 부분은 그런 것들이다.
작가가 살았던 집을 찾아갔을 때, 두리번 거리며 내가 찾고 있었던 것은 작가의 아버지가 중풍으로 거동을 못하게 되어 집을 허물고 새로 지은 집에서 어머니가 심었다던 국화꽃 자리였다. 나는 그 대목을 읽고 책에서 나왔던 황국과 자국 하나씩 사서 우리 집 마당에도 심었다. 사실 노란색 국화와 보랏빛 국화로만 떠올렸던 것인데, 황국과 자국이라 하니 예쁜 색을 넘어 이름을 붙여준 위엄이 있는 것 같기도 하여 나도 버젓한 이름의 황국과 자국을 샀던 것.
‘국화’라는 제목의 글의 일부를 옮겨본다.
나는 마당의 잔디에 배전의 정성을 들였다. 잡초는 눈에 뜨이는 대로 뽑고, 가물면 물을 주고, 잔디가 조금 자라면 깎아 주었다. 그런 내 정성을 잡초가 무시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나는 잔디밭에 돋아난 잡초를 보면 발끈하는 성미를 드러내며 당장에 뽑아 버렸다.
그런데 어느 봄날, 며칠간 청주에 다녀와 보니 아버지의 방 창문 앞 잔디밭에 한 자쯤 간격을 두고 쑥부쟁이 두 폭이 싱싱하게 자라고 있지 않은가! 나는 발끈해서 뽑아 버리려고 보니 그건 쑥부쟁이가 아니고 국화 꽃묘였다. 어머니가 이웃집 새댁한테서 얻어다 심었다고 하셨다. 하필 아버지가 운동을 하시는 발치에 국화를 심어 놓으실 게 뭐람. 마뜩찮아서 담밑으로 옮겨 심으려고 했더니 어머니가 말리셨다.
“얘야, 내버려 둬라. 일부러 창문 앞에 심었다. 늦가을에 꽃이 피면 추워서 밖에도 못 나올 너의 아버지한테 좋은 동무가 될 거다.”
그래서 국화 두 그루가 아버지의 창문 앞 잔디밭을 차지하고 자라게 된 것이다.
차가운 별빛 아래 풀벌레의 애조마저 뚝 끊어지고 서리가 하얗게 내리며 가을이 깊어지자 국화가 시절을 만난 듯 탐스러운 꽃을 피웠다. 하나는 황국, 하나는 자국이었다. 한 쌍이 마주보고 서 있는 모습이 마치 가을날 초례청에 서 있는 신랑 각시처럼 청초하고 아름다워서 집안이 경사스러웠다. 국화꽃은 소설 무렵까지 내내 피어서 아버지의 창을 우수로부터 막아 주었다.
팔십 노모가 병객이신 당신 영감님의 적막한 만추를 유념하여 국화를 심으신 것이다. 내가 태어난 속을 자식인 나는 몰라도 너무 모른다. 병객의 자식들이 생각지 못한 일을 병객의늙은 아내가 생각하셨다.
집의 구조를 살펴본다. 도로 가에서 약간 경사진 곳으로 올라간 막다른 집. 툇마루에 앉아 지는 해를 쳐다 볼 수 있었을 것 같다. 지금은 편리하게 입구부터 마당이 시멘트로 처리되어 있고, 잡초처럼 있는 흙마당은 작가가 간수하려 했던 잔디자리였겠다.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를 위해 요즘 집처럼 현관과 거실형 유리문 형태이다. 집의 오른편이 잠실로 사용되었던 곳이었을까, 왼편에 있는 집일까, 아마 둘 중 하나는 잠실이고 하나는 헛간이었을듯 하다. 현재는 그 집에 다른 사람이 들어와 산다고 하였다. 남의 집에 오래 머물기도 그렇고 사진을 찍고 나왔다.
요즘 전에 보았던 영화를 다시 보게 될 때가 있다. 이전 같으면 어림없는 짓이다. 하나라도 더 보는데 집착하였던지라 보았던 영화는 다시 보지 않았다. 그랬는데 우연히 다시 보게 되면서 ‘세상에 저런 장면이, 또는 진짜 내가 이 영화를 보았던가’ 할 때가 많았다. 영화를 만드는 시간만큼 찬찬히 다시 볼 수는 없지만, 영화든 글이든 이제 다시 여러번 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두 번 이상 보곤 한다.
[누비처네]도 마찬가지였다. 작가가 글을 쓰게 했던 원천들이 모여있던 고향 마을을 찾아가보니, 산천은 의구한데 마을 곳곳은 변하였을 것이다. 그곳을 잠시간 머물러 둘러 보았을 뿐인데, 책을 다시 보니 단어 하나하나가 살아 내게로 오는 것 같았다. 상상력의 한계, 편견으로 보았던 글들이 다시금 보였다. ‘아는 만큼 보인다’ 라는 명언을 언제까지 되새겨야 할까. 아마 죽을 때까지 그러고 살지 않을까 싶다.
작가의 집을 찾느라 마을을 걸었다. 지금은 사과밭이 많다. 아마 이전에는 다랑논과 밭들이었을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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