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 소쇄원
소쇄원은 3대에 걸쳐 조성한 별서다. 처음에는 소쇄정(지금의 대봉대)이라 불리는 작은 정자에서 시작했다. 약 500년 전 그때가 대략 1520년 경이다. 먼저 제월당을 짓고, 그 다음에 광풍각을 조성한다. 이어 두 아들이 광풍각 옆에 고암정사와 부훤당을 짓고 후진을 양성하며 칩거한다. 실제로 소쇄원은 손자 양천운 대에 가서야 완성된다. 소쇄원은 양산보의 외형인 면앙정 송순과 당시 담양부사였던 석천 임억령, 하서 김인후 등의 후원으로 제 모습을 갖추게 됐다. 소쇄원은 처사 양산보가 귀거래를 실천한 곳이고, 그 이상을 도원경에 두고 이를 공간에 실현하려고 한 원정이다. 후손에게 소쇄원을 그대로 지키라는 그의 뜻과 김인후의 ‘소쇄원 48영’ 그리고 200년 후인 1775년에 제작된 목판본 ‘소쇄원도’가 있어 오늘날까지 그 형상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소쇄원은 한국에서 자랑할 만한 매우 귀중한 고전 원정이다.
소쇄원을 대상으로 한 시가 많고 그림도 남아 있어, 우리는 시적 풍경과 회화적 풍경이 같은 풍경을 놓고 어떻게 달리 표상되는지 분명히 알 수 있다. 소쇄정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소쇄원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비록 광활한 일망무제의 조망은 아니지만, 작은 계곡에 아기자기한 그림 같은 풍경이 계절마다 그대로 살아 있다. 지금도 봄 철쭉, 여름 배롱나무, 가을 단풍, 겨울 소나무 설경은 언제 보아도 한 폭의 그림이다. 그 장소에서 시인은 시로 그때를 읊었으나, 시적 표현에서는 계절을 수시로 넘나든다. 시인은 계절과 경물을 이것저것 묘사하면서 감상자에게 시적 풍경을 상상하게 한다. 한편으로 공간의 이미지를 실제 바라보는 것처럼 인식하지 않고, 개인마다 각각 다르게 구성하도록 유도한다.
시와 시적 풍경이 어떻게 변하는지 잘 보여주는 예로 양산보의 5대손인 양경지의 시가 있다. 제명은 ‘대나무를 쪼개 홈을 만들어 물을 흘리되 백일홍의 가지에 걸쳐서 글방의 섬돌 위에 쏟게 하다’로, 다소 길다.
대나무대롱을 자미의 가지에 옆으로 걸치고
흐르는 물은 나누어서 벼루에 떨군다
호사자도 이렇게 하긴 정말 드무니
붓글씨 따라 동산에 신기함이 나타나리
시에서 첫 구절은 회화적 풍경을 보이는 장면이다. 대나무대롱을 배롱나무 가지 옆으로 걸친다. 이것은 화가가 좋아하는 구도다. 그런데 대나무대롱에 흘러들어오는 계류를 나누어 벼루로 보낸다는 시상은 첫 구절의 회화적 풍경에서 시적 풍경으로 전환되는 대목이다. 즉 벼루에 담긴 먹물을 시인은 그림자가 비치는 하나의 연못으로 생각한다. 묵객에게 흥건한 벼루의 먹물은 곧 세상을 비치는 거울이다. 거기에서 세상사가 모두 그려진다. 시인은 방금 전 흐르는 계류에서 순간 시적 상상력을 발휘해 벼루에 물을 떨어뜨리는 풍경으로 바꾼다. 그리고 붓글씨에 따라 그 새로운 모습이 다시 동산에 되비친다는 표현으로, 현실로 되돌아간다.
소쇄원은 시적 풍경과 회화적 풍경을 형성하는 데 필요한 시와 경물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 한여름의 힘찬 폭포와 끝없이 흐르는 계류, 오동나무에서 홀연히 날아가는 산새, 가슴속까지 시원한 대나무 바람소리, 적막한 분위기를 깨고 돌아가는 물레방아의 물 튀는 소리, 잔물결을 만드는 연못의 물고기 그리고 흐르는 물에 떨어지는 꽃잎 등이 시적 풍경을 만들어내는 동적인 요소다. 소쇄원은 시각적으로 다양한 층위를 쌓아 만든 아름다운 원정이다.
당초 아무것도 없었을 계곡을 상상해보라. 거기에 사립문을 만들고 담장을 낮게 쌓는다. 작은 연못에 수초와 물고기를 넣는다. 오동나무를 심고, 대를 쌓아 단풍 구경을 한다. 담 벽에는 시를 건다. 다리를 놓아 물을 건너간다. 바깥쪽의 먼 산으로 가려고 협문을 둔다. 이윽고 매화를 심어 이른 봄 맑은 밤에 꽃구경, 달구경을 한다. 낮에는 복숭아나무와 함께 광풍각에서 시를 짓고, 밤에는 제월당에서 살구나무 사이로 달을 보며 글을 읽는다. 대나무 사이로 다리를 건너오는 반가운 손님을 기다린다. 그렇게 한적한 은사의 일상생활이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가. 이렇게 시각적 이미지의 층위가 새롭게 부가됨으로써 소쇄원은 원래의 모습에서 한 발자국 더 무릉도원으로 다가간다. 김인후의 ‘소쇄원 48영’은 이런 회화적 풍경을 시적 풍경으로 바꾸어 말한다. 방문자는 소쇄원에 머무는 동안 순간순간 시적 풍경과 회화적 풍경을 수시로 느끼고 체험한다. 그 속에서 원정의 아름다움이라는 의미를 다시 새겨본다. 소쇄원은 한국인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선계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아름다운 무릉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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