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세포를 현미경으로 처음 봤던 날이 기억난다. 어느 이른 아침에 나는 연못의 탁한 물을 찻잔에 떠 대학 실험실에 갔다. 썩어 가는 나뭇잎 조각이 위에 떠 있어 천연 퇴비 같은 곰팡내를 풍겼다.
현미경 아래 유리판에 연못 물을 한 방울 떨어뜨리자 하나의 우주가 살아났다. 북적대는 수백 마리 유기체가 시야에 잡혔다. 미세한 단세포 덩이들이 현미경 불빛의 온기에 자극받아, 투명한 몸을 뻗어 옆으로 활보했다. 이런 활기찬 유기체를 지나쳐 유리판을 약간 밀자 거기 아메바가 있었다.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파란 반투명 점에 불과한데도, 현미경으로는 체내 활동까지 다 보였다.
아메바는 단순한 원시 생물이지만 인체와 똑같이 호흡, 소화, 배설, 번식 등의 기본 기능을 모두 수행한다. 특유의 방식으로 이동도 한다. 몸 끝을 앞으로 내밀면 나머지가 따라가는데, 그 동작이 마치 탁자 위에 퍼지는 기름방울처럼 보인다. 그렇게 한두 시간 움직이면 낟알 모양의 액상 덩어리가 8밀리미터 정도 이동한다. 겉보기에는 작은 젤조각이지만 아메바는 엄연히 생명체인 만큼 한낱 물질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부산하게 박동하던 그날의 물방울은 오래도록 내게 생사의 정글을 보여 주는 잔상으로 남았다. 살아 있는 세포를 더 탐색하도록 손짓했다. 우리 인간도 그 정글 속에 섞여 관찰한다. 다만 이제는 의사로서 세포들이 체내에서 어떻게 서로 협력하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투명한 백혈구는 침략자에 맞서 몸을 보호하는 특수 정예군이다. 온통 무기 덩어리인 데다 다른 세포들 틈새를 요술처럼 비집고 다니는 재주가 있다. 몸의 전위대인 셈이다. 현미경유리판에 납작하게 놓고 보면 후추를 뿌린 달걀 프라이와 비슷하다.
박쥐의 백혈구를 관찰하노라면 학생 때 영국에서 처음 본 아메바가 연상된다. 무형의 액상 덩어리인 백혈구도 손가락 모양의 돌기를 내민 뒤 등을 구부려 뒤따르는 식으로 몸속을 돌아다닌다. 정맥 벽을 옆으로 기어갈 때도 있고 혈류 속에 둥둥 떠다닐 때도 있다. 더 좁은 모세혈관을 통과할 때는 백혈구의 큰 덩치가 길쭉하게 변형되어야 하는데, 그 사이에 적혈구가 뒤에 참지 못하고 조급하게 밀쳐 댄다.
순찰 중인 백혈구는 관찰자에게 굼뜨고 무력해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공격이 발생하면 달라진다. 나는 박쥐를 깨우지 않으면서 가느다란 철제 바늘로 날개를 찔러 성한 모세혈관에 구멍을 냈다. 즉시 조용한 경보가 울린다. 손상된 모세혈관 벽 주위 근육세포가 수축을 일으켜 소중한 피를 흘리지 않도록 막고, 응고 인자가 외피의 혈류를 멎게 한다. 그러나 가장 극적인 변화는 느리고 굼뜨던 백혈구에게 나타난다.
정처 없이 배회하던 근처 백혈구들이 마치 후각이라도 있는 양 즉각 멈춘다. 토끼 냄새를 맡은 사냥개처럼 사방의 백혈구가 공격 지점 쪽으로 모이는데, 체형이 자유자재로 변하는 특유의 성질 덕분에 모세 혈관 벽의 겹쳐진 세포 사이도 비집고 지나간다. 백혈구가 도착하면 그때부터 싸움이 벌어진다.
인체 내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을 근접 촬영한 놀라운 작품들로 유명한 스웨덴의 사진작가 레나트 닐슨은 전자 현미경으로 그 싸움까지도 영상에 포착했다. 우선 공상과학 영화에 등장하는 블랍(몸 전체가 점액질이라 끈적끈적한 괴물 슬라임-편집자)이라는 생명체와 비슷한 백혈구가 초록빛을 발하는 구형의 세균 덩어리를 향해 멀리서 육중하게 이동해 온다. 시신을 덮는 시트처럼 백혈구가 세균을 덮어 싸 버리면, 한동안 안쪽의 세균이 으스스한 빛을 발한다. 백혈구에 후추처럼 박힌 점들은 과립형 화학 폭탄이라서 이내 폭발해 침략자를 죽인다. 30초에서 1분만 지나면 몸이 부풀어 오른 백혈구만 남는다.
이 싸움으로 대개 백혈구도 죽지만 하나쯤 죽어서는 표도 안 난다. 성인의 몸에는 500억 개의 백혈구가 현역으로 활동할 뿐 아니라 그보다 100배나 많은 예비군이 골수에 저장되어 있다. 감염이 발생하면 그 예비군이 갓 입대한 새파란 장정들처럼 액체 상태인 골수에서 튀어나온다. 이처럼 몸은 어마어마한 수의 백혈구를 동원할 수 있다. 실제로 의사들은 백혈구 수를 검사해 감염의 심각성을 진단한다.
인체의 1조분의 1 크기에 불과한 이 유기체들에 날마다 우리 목숨이 달려 있다. 물 한 방울에 들어 있는 세균은 지구상의 인구수만큼이나 많을 수 있다. 우리 몸은 온통 세균에 뒤덮여 있으며, 손을 씻으면 살갗의 잔주름에서 최소 세균 500만 마리가 떨어져 나간다. 이 위험한 세상에 요구되는 각종 항체를 인체는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 낼까? 면역학자들이 이 질문을 받으면 으레 우스갯소리로 “GOD” 이라 답하는데, 이는 “다양성의 발생 인자”(generator of diversity)에서 머리글자를 딴 것이다.
한쪽에는 인체의 면역계만 있고, 다른 한쪽에는 과학 자원과 기술은 다 있는데 면역계가 없다고 하자.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면 우리 의사들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전자를 택한다. 에이즈(AIDS; 후천성 면역결핍증)는 인간의 면역계가 고장 나면 첨단 기술도 무용지물임을 잘 보여 준다. 그럴 때는 폐렴이나 입술에 작은 수포가 생기는 구순포진 심지어설사조차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
'문화 책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출산의 기적과 경이 (0) | 2021.01.10 |
---|---|
인체, 우주에서 가장 경이로운 공동체 (0) | 2021.01.10 |
꺼지지 않은 관심사에 불을 붙이고 (0) | 2021.01.03 |
자신의 영혼과 공감하는 스승 (0) | 2021.01.02 |
명사산 월아천 (0) | 2020.1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