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은 탄소 에너지로 작동할 뿐 아니라 탄소로 토양을 조성하긴 하지만 탄소를 멀리 옮기지는 않는다. 기껏해야 나무에 달린 잎사귀가 바람에 날려 떨어지는 거리 정도, 혹은 새가 먹이를 먹고 날아가다가 배설하는 곳까지의 거리, 들소가 먹이를 먹고 이동하다가 배설하는 곳까지의 거리 정도에 불과하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탄소순환에서 동물은 두 가지 역할을 맡는다.
첫째는 영양분을 주변으로 퍼뜨리는 역할이다. 자연이 바이오매스로 형성한 비옥함을 중력에 거슬러 옮기는 방법은 오직 동물뿐이다. 동물이 없으면 바이오매스 분해는 중력 때문에 아래쪽으로 향하게 되고, 언덕 비탈과 꼭대기는 양분이 고갈되리라. 그러나 다행히도 동물들은 비옥한 골짜기에서 어슬렁대는 대신에 포식자들의 먹잇감이 되지 않으려고 언덕 꼭대기로 도망쳐 올라간다. 덕분에 이 고지대 망루는 비옥한 골짜기에서 온 거름의 축복을 받고 그 풍요로움을 주변에 퍼뜨리는 역할을 한다.
둘째, 동물은 바이오매스를 다듬어 식물의 빠른 성장을 유도하는 역할을 한다. 불필요한 부분을 솎아 내는 일은 성경적일 뿐만 아니라 자연의 원리에도 충실한 패턴이다. 뭔가를 풍성히 자라나게 하려면 먼저 가지치기를 해야 한다. 풀도 마찬가지다. 풀은 초기, 중기, 말기의 세 단계를 거쳐 성장한다. ‘S’자 곡선 형태를 그리며 처음에는 서서히 시작해서 중간에 빠른 속도로 왕성하게 자라다가 말기에 접어들면 더뎌진다. 유아기, 청소년기, 노년기로 보면 이해가 더 쉽겠다. 당연한 말이지만, 더 많은 태양 에너지를 바이오매스로 전환하려면 달콤한 급성장기를 더 자주 거치도록 풀을 관리해야 한다.
이런 까닭에 우리 농장에서는 소를 매일 새로운 목초지로 이동시킨다. 우리는 이를 ‘떼몰이 방목 - 초식성 태양전환 - 목질화 탄소격리 - 비옥화’라고 부른다. 뭔가 새로운 방식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들소, 영양, 아프리카들소 등 모든 초식동물들이 자연에서 일하는 방식을 그대로 비추어 말한 것이다. 초식동물은 땅의 고민거리가 아니라 실은 가장 효과적으로 양질의 흙을 만들고 탄소를 격리하는 동업자이다. 하지만 계속 한곳에만 머무르거나 지나치게 많은 수를 방목하면 가장 파괴적인 동업자가 되고 만다.
우리 농장에서는 무엇이 인간에게 가장 편리한지가 아니라 무엇이 토양과 동물에 가장 유익한지를 우선으로 한다. 우선 돌보는 태도를 취하니 신기하게도 실제로 소득과 생산이 증가하는 축복이 있다. 탄소중심 체계는 이렇게 참된 가치를 축적하는 아름다운 그림이다. 잘 돌보면 그 상태를 지속하는 힘이 생긴다. 하지만 참여하지 않고 방치해 버리면 금세 고갈되는 위험에 처한다.
탄소를 고갈시키는 모든 식품체계는 생태계 속에서 작동하는 하나님의 패턴에 도전한다. 탄소는 당연히 유기물 그리고 부식토, 말하자면 흙먼지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인간은 무엇으로 만들어졌을까? 흥미롭게도 ‘인간human’과 ‘부식토humus’는 어원이 같다. 그렇다면 무엇이 부식토를 파괴할까? 주범은 경작이다. 유대인에게는 7년째 되는 해마다 밭을 쉬게 하는 휴경법이 있다. 다년생식물은 양질의 토양을 만들지만 일년생 식물은 토양을 고갈시킨다. 미국의 식량정책은 일년생 식물인 옥수수, 밀, 콩, 사탕수수, 쌀, 목화에 대해 어마어마한 규모의 보조금을 지급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미국의 농업정책은 토양을 고갈시킨다. 반부식토적이며 반인간적이다.
부식토를 파괴하는 두 번째 요소는 화학비료다. 화학비료는 부식토를 소진해 버린다. 대부분의 농학자들에 따르면, 유럽인들이 미국 해안가에 처음 도착했을 당시, 미국 토양의 평균 유기물 함량은 적어도 8퍼센트였다. 지금은 겨우 1퍼센트에 불과하다. 누군가가 그렇게 많은 재산을 그처럼 단기간에 빼앗겼다면 당연히 강탈당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물들을 강탈하는 짓을 언제쯤에나 그만둘까?
초등학생 정도만 돼도 초식동물과 육식동물, 잡식동물을 구분할 줄 안다. 학교에서 우리 농장으로 단체로 견학을 오면 나는 아이들에게 이 용어들의 뜻을 설명해 보라고 한다. 그런후에 소를 가리키며 묻는다. “저건 어떤 동물이죠?” 흐뭇하게도 아이들은 한 목소리로 “초식동물이요!”라고 합창을 한다. 아이들도 소가 육식이나 잡식동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열두 살짜리 애들도 소에게 썩은 고기를 먹여서는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안다. 그런데 서양 세계는, 동양과 달리, 공식 정책을 통해 지난 수십 년간 이를 장려했다. 농무부의 계획을 따르지 않는, 한마디로 나와 같은 농부들은 신기술반대론자, 반과학주의자, 선사시대로 돌아가려는 야만적 네안테르탈인 취급을 받기 일쑤였다. 대체로 기독교 과학자들은 내가 농무부의 계획을 혐오하는 이유가 땅을 정복하고 모든 창조물을 다스리라는 ‘지배’ 명령에 대한 영적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진보주의, 환경주의, 사회주의, 채식주의, 종국에는 범신론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보다니!
‘아니, 기독교인이면서 어떻게 소에게 죽은 소를 먹이는 과학적 발견에 기뻐하지 않을 수 있지? 세상에, 이거야말로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발견이 아닌가!’ 물론, 결국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이제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소해면상뇌증. 바로 광우병으로 잘 알려진 병이 생기고 말았다.
초식동물은 원래 다리가 넷 달린 이동식 발효탱크다. 여러분과 나는 초식동물이 먹는 것을 먹을 수 없다. 우리는 그루터기와 풀, 건초를 먹으며 버틸 수 없으니까. 소의 영광은 섬유소를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영양가 풍부한 생산물로 바꾸는 능력에 있다. 하지만 그런 능력 외에도, 지구상에 이렇게 다양한 초식동물이 이토록 많이 존재하는 이유는 바이오매스를 다듬어 태양광을 더욱 효과적으로 전환하게 하기 위함이다.
나는 초식동물을 하나님의 바이오매스 축적 재시작 버튼이라 부른다. 또 다른 멋진 존재가 있다. 태양광이 바이오매스로 전환되는 연속 과정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작용하는 일등공신, 풀! 그 다음으로는 관목, 마지막으로는 나무가 있다. 숲에 서 있는 그 모든 탄소, 즉 나무를 바라보면 언뜻 납득이 잘 안 가겠지만, 사실 여러분은 수년간에 걸친 축적물을 한꺼번에 눈으로 단번에 보고 있는 셈이다. 풀의 경우는 1년의 어느 한 시기까지 쌓인 분량만 보는 것이라 하겠으나, 만일 40년간 풀이 축적한 바이오매스의 총량을 한눈에 볼 수만 있다면 분명 숲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을 보는 셈이라 할 수 있다.
가장 흥미로운 사실은, 풀의 성장이 둔화되기 시작하는 시기야말로 초식동물이 먹기에 제일 맛있고 가장 영양이 풍부한 시기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초식동물과 풀은 저마다의 영광, 바로 그 고유한 특성이 가장 빛나는 시점에 서로를 원한다. 양치기, 유목민, 농부, 목장주의 역할은 풀이 가장 많이 자라는 시기와 동물이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시기를 서로 맞추는 데 있다.
'문화 책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험이라는 비단조각 (0) | 2021.01.31 |
---|---|
인생 제2막 설계 (0) | 2021.01.30 |
이렇게 살고 싶겠네요 (0) | 2021.01.23 |
도덕적 자기 완성의 길 (0) | 2021.01.17 |
이 길을 모두 택하지 않았다 (0) | 2021.0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