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항일의병에서 독립군단으로

이춘아 2021. 3. 1. 09:22

박민영, [이상설 평전], 선서원, 2020

이상설(1870~1917)
1870. 충북 진천군 덕산면 산척리 산직마을에서 출생~ 1917. 우수리스크 망명지에서 장서. 임종 직전 유고 일체를 불태우고 유언으로 시신도 화장. 가족 외에 이동녕 조완구 백순 이민복 등의 동지들이 임종을 지켜봄

이상설은 매우 총명하였다. 그의 학문 성취는 대부분 자습과 독학으로 이루었다. 러시아에 이주했을 때 불과 두 달 만에 그 어려운 러시아어를 능통하게 깨치고, 자신이 익힌 러시아어를 현지 한인들에게 가르쳤다고 하는 일화가 그 한 예이다. 
이상설은 조선조 마지막 과거가 된 1894년 갑오문과에 25세의 나이로 병과에 급제하였다. 그가 지은 과거 답안지라 할 시권을 통해서 그의 학문의 일단을 파악할 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이상설의 시권은 [지어지선]론과 [의송군신하일하오색운견] 표 등 2건이다. 전자인 [지어지선]론은 대학의 세 가지 강령 가운데 하나인 ‘지극한 선에 머문다’는 ‘지어지선’의 개념과 가치를 놓나 사변적 철학적 글이다. 이에 비해 후자는 제왕의 덕치와 자연의 감응을 위정의 차원에서 논급한 표문이다. 이러한 시권은 이상설의 뛰어난 학문적 역량과 명석한 논변을 그대로 대변해주는 생생한 징표가 된다. 

이상설과 깊은 관계가 있었던 조완구(1881~1954)도 그의 학문을 매우 높이 평가하였다. 
(이상설은) 풍채가 배어났으며 타고난 성품이 후덕하고 재주와 사리가 넘쳐났다. 이치를 깊이 탐구하고 끝까지 찾아내서 조금도 교만하지 않았다. 8,9세에 공부가 제법 깊어서 세상 사람들이 신동이라 불렀다. 유교 경전의 이치를 깊이 깨달았고, 불교의 경전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또 수학을 익혀 심오한 경지에 이르러 당대의 권위자가 되었다. 아울러 영어와 러시아어를 할 줄 알았고, 볍률을 연구하고 익혔으니, 이 모두가 스승 없이 스스로 익힌 것이다. 그 기품과 학문이 뛰어나서 사우들에게 본보기가 되었다. 

이상설이 근대 수학이 가지는 학문적 가치와 효용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특히 주목된다. 전통 유학을 공부한 처지였지만 그는 한국이 선진국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서양의 과학, 특히 근대 서양수학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으ㅟ식과 생각이 그로 하여금 서양 수학을 독학으로 공부하게 하였고, 최초의 교과서 [산술신서]까지 간행하게 한 것이다. 

이상설이 태어나 성장하던 시기는 일제의 침략으로 인해 조선의 국권이 침탈당하던 민족 수난기와 맞물려 있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을 필두로 청나라와 군국주의 일본이 개입되는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 등 대립과 갈등이 연속되는 혼란과 격변의 와중에 휘말렸고, 급기야 1894년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이 발발하기에 이르렀다. 

이상설이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게 되는 것은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직후였다. 그가 전개한 활동의 뚜렷한 공적으로는 두가지가 있다. 병탄의 전 단계로 국토의  일부를 강점하려는 일제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에 반대한 투쟁, 그리고 망국조약인 을사조약을 규탄하고 5적 처단을 요구한 을사조약 반대투쟁이다. 

을사조약 늑결 후 이상설은 국외망명을 결심하고 이를 결행하였다. 1906년 음력 4월18일 양부 이용우의 제사를 모신 뒤 석오 이동녕(1869~1940)과 함께 비밀리에 조국을 떠나 중국 상해를 거쳐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그곳에서 황달영 정순만 김우용 등 동지들과 만나 함께 크라스키노(연추)를 경유하여 목적지인 북간도 용정으로 들어갔다. 연추에서는 러일전쟁 후 그곳으로 망명하여 항일투징을 벌이던 전 간도관리사 이범윤을 만나 함께 독립운동의 방략을 협의하기도 하였다. 

북간도의 용정은 당시 국외 한인사회 가운데 한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던 곳으로 독립운동의 새로운 근거지로 삼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이동년 등 동지들과 함께 용정촌에 도착한이상설은 사재를 들여 천주교 회장 최병익의 집을 빌렸다. 그곳에서 규모가 가장 컸던 그 집을 학교 건물로 고쳐서 한인 청년자제를 모집하여 학교를 열었다. 민족교육의 요람이 되는 서전서숙은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이상설이 북간도로 망명한 것은 당시 뜻있는 민족지사 대부분이 망국조약을 계기로 국내에서는 더 이상 구국투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장기지속적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새로운 근거지를 찾아 러시아 연해주, 서북간도, 미주 등 국외로 탈출하던 것이 당시 일반적인 추세였다. 정치적 동기로 망명한 이주민 가운데는 이상설과 같이 민족의식이 투철하고 국내에서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도 비중 있는 지위를 가진 인물 상당수가 포함되어 있었다. 

1894년 청일 전쟁 이후부터 국내에서 항일전을 수행하던 의병세력의 북상과 도강은 독립운동의 국외확대인 동시에 무장투쟁의 새로운 국면 전환이었다. 서북간도와 연해주를 향한 의병의 북상은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는 1908년 하반기 이후 더욱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국내에서 활동하던 의병은 일제군경의 탄압을 피하고 새로운 항전 근거지를 구축하기 위해 북상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결국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 서북간도로 건너가 장기 지속적인 투쟁방략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처럼 북상 망명한 항일의병은 특히 연해주 일대에서 활발한 항일전을 벌였다. 1909년 10월26일 대한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역에서 처단한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는 연해주의병의 피날레를 장식한 민족적 쾌거라 할 수 있다. 

1907~1908년간에 활동한 관북지방 의병의 경우, 그와 같은 북상 망명 추세를 뚜렷이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파악된다. 이남기와 최경희를 비롯해 김정규 지장회 등 함북 경성의병의 핵심인물들은 국내 항전을 종료한 뒤 북간도와 연해주 등지로 대거 망명하면서 새로운 활동방안을 모색하였다. 또 함남의 북청 삼수 갑산 등 개마고원 주변에서 영웅적인 항일전을 수행하던 홍범도와 차도선 등 산포수의병들도 전력이 고갈되어 서북간도와 연해주 일대로 넘어와 각지를 전전하며 항일활동을 지속하며 재기항전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 밖에도 양서지방에서 항일전을 수행하던 이진룡과 조맹선, 중부지방에서 활동하던 박장호 등의 의병장도 경술국치 전후 새로운 항전 근거지를 찾아 북상도강을 결행하게 된다. 이처럼 망명한 항일의병은 1919년 3.1운동 이후 무장항일전에 의한 독립전쟁론 구현 분위기가 급속하게 확산하자 각처에서 새로운 형태의 독립군단을 편성하였다. 서간도의 대한독립단. 북간도의 대한독립군과 대한의군부 등이 그와 같은 범주에 들어가는 대표적인 독립군단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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