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은(1907~1997): 경북 선산 출생, 1915년 부친 따라 서간도로 이주, 1922년 석주 이상룡선생의 손자 이병화와 결혼, 1932년 환국하여 임청각 종부로서 안살림을 맡음. 1995년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출간
만주의 허허벌판은 이때부터 흰옷 입은 우리 민족들로 허옇게 덮여 갔다. 멀리서 서로 쳐다만 봐도 든든했다. 이렇게 되자 애국지사들이 한인자치단체를 만들어 엄중한 규율을 세우고 학교도 세웠다. 일본에 빼앗긴 나라를 도로 찾을 때까지 만주 땅에다 하나의 작은 나라를 만들어 운영한 셈이었다.
서간도에만 해도 학교가 이백여 개는 된다고 들었다. 북간도에도 서간도 못지않게 학교들이 세워졌다고들 했다. 북간도는 서간도보다 더 진보적이라고 들었다. 동흥중학교, 대성중학교 등이 들어 본 이름들이다. 한인학교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이 합니하에 세워진 신흥무관학교이다. 우당 이회영, 성재 이시영 형제와 나의 시조부인 석주 이상룡 선생이 주축이 되어 세우셨다. 큰오빠가 이 학교에 입학해서 제일 먼저 배워 온 노래가 아직도 생각난다.
슬프도다, 우리 민족아!/ 오늘날 이 지경이 웬일인가?/ 사천여 년 역사국으로/ 자자손손 복락하더니/ 오늘날 이 지경이 웬말인가?/ 철사주사로 결박한 줄을/ 우리 손으로 끊어 버리고/ 독립만세 우뢰 소리에/ 바다가 끓고 산이 동하겠네
내가 시집가기 십 년 전, 1913년에 시아버님은 안동 고향집 임청각을 팔려고 매도증서를 준비했다고 한다. 학교 운영비와 활동자금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중에서 못 팔게 해서 어른께서 막 소리 지르고 야단하셨다고 한다. “내 집 팔려는데 왜 못하게 하느냐”라고 하시며, 합방 후라 일본 정부에서 방해를 하기도 해서 결국 못 팔았다. 그 대신 문중에서 돈을 좀 만들어 주어서 그것을 가지고와 보태 썼다는 것을 나중에 시집오고 나서 들었다.
열여섯 살 되던 해(1922년), 음력 섣달 스무이튿날로 혼인날이 정해졌다. 철로 육로 합해 이천팔백 리 길인데 이렇게 분주한 시국에 더 이상 미루는 건 안되겠다 싶어 결정한 것이라 했다. 길림은 시내 여관에 들면 일본 스파이가 많아서 안된다고 여러 사람들이 제중의원에 가라고 했다. 이 병원 주인은 서울에서 왔는데 이시영, 이회영 씨 형제가 한국에서 만주로 올 때에 같이 온 모양이었다. 환전현에 있다가 길림에 온 지는 일 년 되었다고 했다. 이 병원은 동포들 치료뿐 아니라 독립운동가들 비밀연락처이기도 하였다. 우리가 갔을 때도 독립운동하는 분들이 다 모여 있었다.
기차로 마차로 해서 꼬박 열이틀 걸렸다. 열여섯 어린 나이에 시집가는 길이 그토록 험난할 줄이야.. 방안에 앉으니 과일, 떡국 등을 차려 내놓았다. 화전현 완령허 신랑집에서는 우리가 그곳을 향해 출발하던 날부터 잔치를 한다고 돼지를 잡고 친척들이 원근간 다 모였다. 그런데 십여 일을 기다려도 오지 않으니까 일부는 돌아가고 일부는 열이틀째 기다리고 있다.
당시에는 워낙 어려서 잘 몰랐으나 시집오기 전에 삼원포, 유하현, 고산자로 옮길 무렵이 학교와 세포단체가 많이 조직되고 활동도 활발했던 것 같다. 의견 충돌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한국 독립에 근본 목표를 두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한다는 의식을 일깨우려 하였다. 어쨌든 교육활동과 계몽활동도 그때가 가장 활발했던 것 같다. 항상 손님은 많았는데, 땟거리는 부족했다. 점심 준비하느라 어떤 때는 중국인에게서 밀을 사다가 국수를 만들곤 하였다. 마당의 땡볕 아래서 맷돌을 돌려 가루를 내고, 또 그것을 반죽해서 국수를 뽑았다. 고명거리가 없으니 간장과 파만 넣어 드렸다.
열여덟 살 되던 해에 첫애기가 들어섰다. 그해 양식이 없어서 고생했다. 좁쌀도 없어서 겨우 뜬 좁쌀을 구해 왔다. 그걸로 밥을 해 놓으면 색깔도 벌겋고 곰팡내가 나서 아주 고약하다. 쌀밥 한번 실컷 먹어 봤으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중국인 집에 가서 소금을 조금 얻어다 김치를 담가서 겨우 입덧을 달랬다. 남편은 신흥무관학교에 다니느라 합니하에 가 있었다. 방학하면와서 잠깐씩 지내다 가곤 했는데 쌀밥 한 번 못해 주었다. 애기 낳은 지 한 달이 되니까 애 아버지가 왔다. 그때 잠깐 와 보고 훌적 떠난 후로 육 년 동안 한 번도 안 나타났다. 신흥무관학교 다질 때 벌써 독립운동 바람이 들었다. 열여섯 살에 그 학교에 들어가서 졸업학기에 이미 만주 전역과 전 조선을 훑고 다닌다고들 했다. 나타나면 그제야 왔다 보다 했다. 육 년 동안 네 분 어른들 조석 봉양하고 사랑손님들 치다꺼리만 해도 역부족이었다.
석주 어른은 집에 안 계실 때가 많았다. 북경 가셨거나 상해 가셨거나 했다. 아랫대 아버님은 집에 앉아서도 부민단 책임을 맡아 일하셨다. 부민단은 우리 친정의 성상 할아버지가 창솔하시고 초대 단장을 역임했었다. 2대 단장이 석주 어른이었지만 늘 외지에 가 계시니까 실무는 시아버님이 담당하신 거였다.
을축년(192년) 여름 석주 어른께 상해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으로 부임해 달라는 연락이 왔다. 내각책임제의 국무령이면 지금의 대통령에 해당한다. 상해에서 만주권 독립인사를 영입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활동은 북간도와 서간도를 망라한 만주 일대에서 먼저 시작되었고, 그 쌓아 놓은 기반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런데 석주 어른은 그 이듬해 음력 삼월에 국무령을 사임하고 나오셨다. 만주권 인사들과 다른 계파 사이의 의견 충돌 때문이었던 것 같다. 주도권 싸움이었겠지만 그 당시 임정은 여러 파로 갈라져서 세다툼이 심했다. 국내와 중국 만주 노령(러시어) 미주 등지에서 각각 활동하던 투사들이 합치기로 하고 모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내부 사정이 복잡했다. 내분을 보다 못한 어른은 임정이 실패라 판단하시고 스스로 사임하신 듯했다.
1932년 오월 “국토를 회복하기 전에는 내 해골을 고국에 싣고 들어가서는 안 되니, 이곳에 묻어 두고 기다리도록 하라.”고 하셨다. 58년 만에 유골은 정부(국가보훈처)의 노력으로 환국했으나, 아직도 국적은 회복되지 못했다. 고택제향에 호화반석 같으신 처지시건마는 이역풍진에 갖은 고초 다 겪으시고 광복 성공의 기약 없이 영원히 가셨다. 그로부터 사흘 후에 우리는 환국을 서둘렀다. 시신과 함께 시조모님, 시부모님, 남편, 아들 형제, 모두 일곱 식구였다. 그동안 한가족처럼 지낸 온 이진산 씨네 가족도 함께 떠났다. 석주 어른 임종하실 때에 “선생님, 선생님! 광복사업은 누구에게 맡기고 가십니까? 통화현, 회인현, 영춘원 양쪽 칠십 리 높은 재를 넘으실 때 기력이 좋으시어 독립사업 꼭 성공하리라 믿었습니다.” 하며 대성통곡을 하였다. 적수공원 애국심 하나만 가지고 망명의 길로 나섰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신 어른의 한을 대신 울어 드렸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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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택인 임청각은 고택향원이었다. 하늘끝을 향한 용마루가 가문의 위엄을 말해 주는 듯했다. 정확히는 잘 모르나 팔구십 칸은 족히 되는 큰 기와집으로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건축물이다. 조상 대대로 물려 내려온 이 집에 종부로서 처음 들어서자 만감이 교차했다. 객지에서 땟거리 걱정만 하고 어른들 약 시중이나 들던 내가 이제부터는 이 가문의 종부 노릇을 잘 해낼지 걱정이 앞섰다. 어린 시절 이역만리 떨어져 거친 세파 속에 자란지라 지고의 예의범절과 견문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가솔들 굶기지 않으려고 호미 잡고 풀 뽑는 것밖에 아는 것이 없었고, 어른들 시탕과 약 시중밖에 할 줄 몰랐다.
8.15 해방이 되기까지 남편은 계속 상주 노릇을 해야 했다. 조부님, 조모님 돌아가시고 삼년상 중에 또 부친상, 모친상이 연이었으니 계속 상주였다. 상주인데도 십여 차례 끌려가 아무 근거 없이 서너달 씩, 어떤 때는그보다 더 길게 갇혀 있었다. 윗대 어른들은 만주에서 활약하셨기에 옥살이는 안 하셨다. 그러나 남편은 귀국 후에도 감옥을 밥 먹듯이 드나들었다. 다 지난 일이라 이렇게 쉽게 얘기할 수 있지만, 그때는 어른들 모시고 수발드느라 내색도 못하였다.
만주 망명 후 어찌된 셈인지 우리 가족 모두 호적이 말소되어 있었다. 다시 취적을 하는 데도 쉽지 않았다. 서울로 대루로 몇 번씩 봉투가 왔다 갔다 하더니 나중에 재판을 통해서 하기는 했다. 나이가 더러 차이가 나기도 했으나 그대로 끝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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