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그래도 용케 살아났다

이춘아 2021. 2. 27. 03:35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 독립투사 이상룡 선생 손부 허은 여사 회고록](구슬 허은, 기록 변창애, 민족문제연구소, 2010 재출간)


허은(1907~1997): 경북 선산 출생, 1915년 부친 따라 서간도로 이주, 1922년 석주 이상룡선생의 손자 이병화와 결혼, 1932년 환국하여 임청각 종부로서 안살림을 맡음. 1995년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출간


“열여섯 살 어린 나이에 시집가서 독립활동하시는 시어른들 뒷바라지하면서, 낯선 간도 땅을 고사리 같은 손으로 억척스럽게 개척해 나간 손위 시누이의 이야기는 나 자신을 무척 부끄럽게 했다. 
밖에서 활동하셨던 어른들은 이제 독립유공자로 추대도 받고 역사의 주인공들로서 제 위치를 당당히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안살림을 전적으로 책임졌던 허은 여사는 독립훈장도 없고, 역사책에 그 이름 한 자 올라가 있지도 않다. 그분이 구십 성상 살아온 발자국이 우리나라 근대사의 산 역사 그 자체건만 그분은 머잖아 한 시대의 뒤안길로 조용히 사라지고 말 것이다. 
글을 써 본 경험이 없는 나로선 손위 시누이의 말씀 그대로를 살리는 일에만 충실하면 되리라는 생각으로 용기를 내었다. 구술 역사는 보통사람의 삶, 별로 화려할 것도 요란할 것도 없으나, 삶 그 자체가 진실을 충분히 담아내리라는 생각으로 집필을 시작하게 되었다. 
손위 시누이께서는 그저 담담하게, 흘러간 옛날을 가슴 저 밑바닥에서 한올 한올 풀어냈다. 특별히 한스러워하거나 애통해하지도 않으셨다. 너무도 벅찬 경험들로 감정이 메말라 버린 것도 같았다. 그러나 삶 그 자체가 한이요, 나라의 운명이 바로 한인데, 듣는 사람으로서는 굽이굽이 한스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손위 시누이의 이야기는 크게 세 가닥으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시집가기 전 임은 허씨 일가의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에 따른 망명생활이고, 둘째는 고성 이씨 집안으로 시집가고 난 뒤 시할아버지인 석주 이상룡 선생을 위시한 온 집안의 항일투쟁사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서간도 땅에서의 이민 개척사이다. 
그동안 독립운동사에 관한 연구는 진전이 있었으나, 만주 특히 서간도에서의 활약사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는 걸로 안다. [석주유가]가 영인되었으나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그내용이 쉽사리 파악되지 않고 있다. 이것도 언젠가는 해결해야 할 숙제이다. 다만 허은 여사의 진솔하고 담백한 구술로써 이 일부를 충당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 8.15 광복 50주년을 기리며, 1995년 5월 변창애


1915년 음력 2월에 나는 여덟 살이 되었다. 재종조부이신 왕산 허위 어른께서 순국하신 뒤 줄곧 일본 순사들에게 시달리던 우리 일가 사람들은 일제히 짐을 쌌다. 그리고는 서로 집을 바꿔 가며 살았다. 오죽했으면 왜놈 눈 피하려고 그런 꾀를 다 냈을까. 허씨 일문의 대소가들이 서간도로 망명하기 바로 직전에 그랬는데, 아마 서간도로 아주 떠날 준비를 하면서 일본 순사들을 혼란케 하려고 그랬던 것 같다. 

왕산 허위 선생은 우리나라 의병운동의 대표적 인물이다. 동대문에서 신설동, 청량리로 뻗은 도로이름을, 이 어른의 호를 따서 ‘왕산로’라 하는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역사적으로 이름난 분이다.  을미년(1895) 국모시해 사건이 나자 안연히 앉아 있을 수 없어 동지 이은찬, 조동호, 이기하 등과 모의하여 김천 장날 거사하였다. 무기고를 탈취하여 성주로 가던 중 관군과 접전하게 되었다. 인근 각 읍에 격문을 보내 의병이 합세하여 진천까지 이르렀을 때, 해산하라는 고종황제의 내밀한 칙서를 받고 왕명을 어길 수 없어서 눈물을 머금고 해산시켰다. 

그후 5년간은 입궐하여 성균관 박사, 중추원 의관, 평리원 재판장, 의정부 참찬, 비서원승 등을 역임하고 종2품 가선대부의 품계까지 올랐다. 비서원승으로 있을 때 일본의 주권 침탈과 자유 억압 등의 만행을 열거한 격문을 살포하다가 일군에게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찬정 최익현, 판서 김학진 등도 같이 피검됨으로써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켰다. 구속된지 넉달 만에 석방되니, 관직 생활은 이로써 청산할 수밖에 없었다. 왕산은 이때 이미 항일운동의 첫 신호를 올린 것이다. 

관직을 박탈당한 후 정미년(1907) 헤이그밀사 사건 때문에 군대가 해산되는 걸 보고 다시 경기도에서 창의하였다. 동서남북 없이 도처에서 의병이 창궐하여 일제의 강압에 의한 군대해산의 부당함을 온 세상에 알렸다. 왜병들이 왕산 어른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온 동네를 몇 달씩 뒤지고 다녔다. 의병대장 왕산을 찾아내라는 강압에 집안 식구들이 당하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1908년 5월24일, 연천땅 반석동의 깊은 산촌에서 철원의 일본헌병 분대장 태전청송 대위가 거느린 부대의 기습을 받아 체포되었다. 10월23일 쉰네 살을 일기로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서울 서대문형무소 교수형 제1호였다. 

그의 유족들은 더 이상 국내에서 견뎌 낼 수가 없었다. 왕산의 둘째 형인 성산과 함께 모두 만주로 갔다. 만주에 가서 더욱 본격적으로 항일투쟁에 뛰어들었다. 왕산의 아들 허학(1887~1940 독립운동가)은 1917년 서간도 유하현 전수허자에서 이세기 등과 동흥학교를 창설하여 칠백여 명의 광복운동 동량들을 양성하였다. 우리와는 만주생활 내내 서로 의지하고 도우며 살았다. 

(. . . )

배로 보름을 가서 닿은 곳은 회인현(지금의 환인현) 화전이었다. 서울서부터 동행해 함께 놀아 주고 꽃다발도 만들어 주던 오정현 씨와는 거기서 작별하였다. 상해로 간다고 했다. 

이제부터는 육로여행이었다. 말 스무 필을 임대했다. 겨우내 얼었던 땅이 녹아서 마차가 다니지 못했다. 흙이 찰지기 때문에 발을 디디면 푹 바졌다가 발을 올리면 찰떡같이 달라붙어 걸음을 떼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 땅을 ‘늪땅’이라 한다는데 여름에도 가물 때만 제외하고는 늘 그렇다고 하였다. 

드디어 통화현 다취원이란 곳에 다다랐다. 삵말을 끌고 온 마부들은 그곳이 우리와 계약한 종착역이라면서 짐을 다 풀어 놓고 가 버렸다. 

그곳에는 이미 사오 년 전에 본국에서 건너오신 애국지사들이 살고 있었다. 대략 열 집 정도였는데,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분들은 이민 오거나 임무를 띠고 오는 사람들을 최종 정착지까지 안내해 주는 일을 맡고 있었다. 우당 이회영씨와 함께 서간도에서 먼저 자리 잡고 있던 유기호씨 하재우 씨등이 며칠 뒤 왕산댁이 계시는 다황거우까지 안내해 주었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나중에 보니 이분들이 이민 오는 동포들의 대책반이었다. 

이역만리 타관 땅에서 고생만 하다가 일가친척들을 한꺼번에 만나게 되니 서로들 너무나 반가워했다. 더구나 왕산댁은 고향을 황급히 떠나면서 우리에게 맡겨 두고 간 막내딸을 만나게 되어 더욱 반가워하셨다. 살아서 다시 보게 될지 어떨지 막연했는데 이산가족 상봉의 기쁨으로 눈물바다가 되었다. 

압록강 건너올 때 신의주에서 소금 친 갈치를 많이 샀었다. 소금이 없어서 몇 달 동안 소금 대신 짠 갈치를 아주 조금씩 아껴 먹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뜬 좁쌀죽에 소금하고 겨우 먹었다. 눈만 떴지 송장아니 다름없이 누워만 지냈는데 그래도 용케 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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