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제자리에 돌아왔습니다

이춘아 2021. 5. 13. 00:20

마종기,詩작에세이[당신을 부르며 살았다], 비채, 2010.


정신과 병동

비 오는 가을 오후에
정신과 병동은 서 있다
지금은 봄이지요. 봄 다음엔 겨울이 오고 다음엔 도둑놈이 옵니다.
몇 살이냐고요? 오백두 살입니다. 내 색시는 스물한 명이지요.

고시를 공부하다 지쳐버린
튼튼한 이 청년은 서 있다
죽어가는 나무가 웃는다
글쎄, 바그너의 작품이 문제라니 내가 웃고 말밖에 없죠.
안 그렇습니까?

정신과 병동은 구석마다
원시의 이끼가 자란다
나르시스의 수면이
비에 젖어 반짝인다

이제 모두들 제자리에 돌아왔습니다.

추상을 하다, 추상을 하다
추상이 되어버린 미술 학도
온종일 백지만 보면서도
지겹지 않고, -
가운 입은 삐에로는 비 오는 것만 쓸쓸하다.

이제 모두들 깨어났습니다.

*******

이 시는 1963년에 발표한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긴 터널같이 느꼈던 의과대학을 졸업한 해가 된다. 딴 시들과는 다르게 발표한 해를 정확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이제는 돌아가신, 내가 제일 존경하던 시인 김수영 선배 덕분이다. 오래전 이분이 <1963년의 시단 총평>이란 긴 글을 신문인지 잡지에 발표하셨는데 그 글이 시인이 돌아가신 후에 발간된 시인의 전집에 들어 있었고, 나는 우연히 그분의 전집을 읽다가 알게 되었다. 김수영 시인은 그 긴 글에서 1963년에 발표된 시 중에서 잘 써진 10여 편의 시들에 대해 한 편 한 편 논평을 하셨다. 그리고 그 글의 맨 끝에 내 시 <정신과 병동>을 전문 게재하고 그해 최고의 시라고 극찬을 해주셨던 것이다. 이 시는 이분의 글에서 말고도 여러 곳에서 상당한 주목을 받았는데, 아마도 시의 내용이 주는 자극적인 인상과 제목이 주는 신선한 감각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 시에 나오는 두 사람의 정신분열증 환자는 내가 의대 3학년 정신과 실습 중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거기에 대한 환자 분석 소견을 써냈던 환자다.

나는 지금도 처음으로 만났던 이 두 환자의 인상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한 환자는 좋은 대학을 졸업했고 여자 환자는 대학교 재학생으로 두 사람 다 자의식이 무척이나 강했다.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해보아도 정신과 의사는 나같이 심약한 사람에게는 마땅한 전공이 아닌 것 같지만, 작금에 흔하게 논의되는 정신의학과 문학의 상관관계에 대한 책을 읽다가 보면 의대생 시절, 꿈속에까지 나타나던 그 환자들이 문득 생각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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