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신호가 가는 소리

이춘아 2021. 5. 13. 00:17

마종기, 詩작 에세이 [당신을 부르며 살았다], 비채, 2010.

전화

당신이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전화를 겁니다.
신호가 가는 소리

당신 방의 책장을 지금 작게 흔들고 있을 전화 종소리, 수화기를 오래 귀에 대고 많은 전화 소리가 당신 방을 완전히 채울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래서 당신이 외출에서 돌아와 문을 열 때 내가 이 구석에서 보낸 모든 전화 소리가 당신에게 쏟아져서 그 입술 근처나 가슴 근처를 비벼대고 은근한 소리의 눈으로 당신을 밤새 지켜볼 수 있도록.

다시 전화를 겁니다. 
신호가 가는 소리. 


*******
요즈음에는 핸드폰이라고 부르는 휴대용 전화가 범람하지만 불과 얼마 전만 해도 그런 전화는 없었다. 그런 시절에 이 시는 써졌다. 간단해서인지 많은 이들이 좋아해주고 낭독용으로도 많이 알려진 이 시에는 내 가까운 친구와 얽힌 이야기가 있다. 

오래전의 가을이었을 것이다. 나와 어릴 때부터 가까웠던 친구 하나가 나를 찾아와서 부탁을 하나 하고 싶다고 했다. 공대를 나오고 좋은 직장을 가지고 있던 그 친구는 자기가 한 여자를 오래 좋아하고 있는데 그 여자는 도저히 자기의 진심을 받아주지도 않고 만나주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친구는 한 번만 그 여자 친구를 자기 대신 만나주고 자기의 진심을 전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여자를 만나서 내 친구가 얼마나 성실한 친구인가를 설명해주고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 같다고 말해 주었다. 절반 이상의 성공을 이루어낸 나는 친구에게 큰 턱을 얻어먹었고 가끔 친구에게 그 후의 일을 물었다. 친구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가때마다 여자의 하숙방 근처를 거닐고 가끔 전화를 하는 것밖에 없다며 여자의 가족이 방문하지 않는 시간이나 여자가 집에 없을 만한 시간에도 전화를 한다며 웃었다. 나는 사람도 없는데 전화는 해 무엇 하느냐고 의아해하며 놀렸지만 친구의 일편단심은 변하지 않았다. 

고국을 떠난 지 만 5년 후, 나는 첫 번째 귀국을 했다. 친구의 부인은 바로 내가 5년 전에 만났던 그 여자분이었다. 좀 더 차분해진 인상 말고는 별로 달라진 모습이 없었다. 그사이 두 아들의 엄마가 된 부인께, 나는 술 한잔 마신 김에 결혼 전 친구의 전화에 대해서 물었다. 부인은 웃으면서, 자신을 한 번도 귀찮게 하지 않고 늘 배려해주면서도 끈질긴 그 전화 걸기가 자신에게는 감동으로 다가왔고, 그 때문에 결국 만나기 시작해서 결혼에 이르렀다고 했다. 며칠 후 고국을 떠나는 공항에서도 나는 부인의 말을 다시 생각하며 떠나야 하는 내 심드렁한 마음을 달랠 수 있었다. 그 후부터 수십 년, 내가 일시 귀국을 할 때면 친구와 나는 언제나 꼭 만나야 하는 더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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