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에 다니는 동네 아이가 공원에서 두발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졌다. 나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뒤따르는 자전거들이 많았으므로, 나는 아이를 안아서 길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아이는 무르팍이 깨져서 피가 조금 배어 나왔다. 아이는 엄마를 부르며 울었다. 아이는 핸드폰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는 아이에게 엄마 핸드폰 번호를 물어서 내 핸드폰으로 엄마에게 연락해주었다. 집이 가까워서 엄마는 금세 달려왔다. 젊고 아름다운 엄마였다. 울음을 그쳤던 아이는 엄마를 보자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들은 엄마를 보면 참았던 설움이 복받치는 모양이다. 아이는 울면서 엄마한테 말했다.
- 내가 넘어져서 우는데, 이 산신령 할아버지가 날 구해줬어. 아이 엄마는 우는 아이를 안고 달래면서 깔깔 웃었다. 아이 엄마가 말했다.
- 얘가 그림책을 너무 많이 봐서 이렇게 됐어요. 할아버지, 죄송해요. 요즘도 산신령 나오는 그림책이 있는 모양이다.
아이는 동화 속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 울음을 그친 아이는 엄마와 함께 돌아가면서 나를 향해 단풍잎 같은 손을 흔들었다. 일산에서 20년을 살고 나니 나는 호수공원의 산신령이 되었다.
공원에서 남성 노인과 여성 노인들은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다. 여성 노인들은 모여서 주로 수다를 떤다. 여성 노인들은 그룹별로 모이는 장소가 따로 있다. 그들은 생애 전체와 눈에 보이는 것 모두를 수다로 바꾸어놓을 수 있는 놀라운 언어능력을 지니고 있다. 나는 무심한 척 그 옆자리에 앉아서, 나중에 혹시 써먹을 수 있겠거니 하면서 그들의 수다를 메모했는데, 지금이 써먹을 때다.
대형병원에서는 70살이 넘은 노인들에게는 대장내시경 검사할 때 부작용을 우려해서 수면검사를 해주지 않는다. 여성 노인들은 수면 검사를 해주는 작은 병원에 대한 정보를 서로주고받는다. 맨정신으로 대장내시경 검사를 받으려면, 바지를 벗고 항문을 젊은 의사 쪽으로 내밀어야 하고, 꼬챙이가 대장 안으로 들어올 때의 느낌이 너무나 모욕적이라고, 한 여성 노인이 말했다. 그러자 다른 여성 노인은, 그래도 맨정신으로 받는 편이 안심이지, 수면검사했다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죽지도 않으면 자식들이 얼마나 힘들겠냐고 말했다. 결론은 없었다.
또다른 여성 노인은 골다공증에 걸려서 몇 년째 고생을 하고 있다면서 골다공증에 걸린 원인이, 소싯적부터 월경피를 흘렸고, 자식 셋을 젖 먹여 기를 때 애들이 먹성이 좋아 젖꼭지를 깨물어서 놓아주지 않고 사정없이 꿀꺽꿀꺽 빨아먹었으며, 남편이 속썩여서 눈물을 많이 흘렸기 때문에 몸속과 뼛속의 진액이 다 빠져나가 뼛속이 말라서 버스럭거리고 뼈마디에 윤활유가 말라서 마디마디마다 부딪치고 갈리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 여성 노인은 약을 먹어도 아무 효과가 없다면서 병원을 바꾸어야겠으니 용한 데를 가르쳐달라고 말했다. 그러자 또다른 여성 노인이 대거리를 하는데, 이제는 월경도 진작 끝났고 젖 먹일 아이도 없고 남편도 늙어서 마누라를 속썩일 힘이 없어졌으니, 늙음을 복으로 알고 살아야 한다면서, 약을 먹어서 병이 낫는다면 죽을 놈이 누가 있겠느냐, 어차피 이약 저약 먹어봐야 다 마찬가지니까 병원을 바꿀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죽는 얘기가 나오자, 아프지 않고 냉큼 죽는 것이 최고의 복이라고 다들 말했다. 오래 아프다가 죽으면 얼굴이 망가져서 추악해진다고 한 여성 노인이 말하자 다른 노인이, 아니 뭐 죽어서도 거울 볼 일이 있니, 라고 마랬고, 또다른 노인은, 내가 거울 보는 게 아니라 염하고 입관할 때 남들이 나를 보니까 걱정되는 게 아니냐, 고 말했다.
또다른 여성 노인은, 예전에는 죽으면 땅에 묻었지만, 지금은 우선 냉동창고에 넣었다가 화장터로 가져가니까, 얼음구덩이에 들어갔다 나와서 또 불구덩이에 들어갈 일이 무섭다고 말했다.
이야기는 결론이 없었지만, 이야기 자체의 신명에 이끌렸고 어조에 리듬이 붙었다. 수다는 한이 없었고, 결론은 없었다.
늙은 여성들이 젊은이들을 못마땅하게 말할 때는 ‘요샛걸들’이라는 삼인칭 복수대명사를 쓴다. 내가 분석해보니까, ‘요샛것들’이란 주로 며느리들을 가리키는데, 이 며느리는 자신의 며느리일 수도 있고, ‘요새’ 며느리들을 싸잡아서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며느리라는 집단을 흉볼 때는, 한 명이 말하면 봇물 터지듯이 다들 따라한다.
어떤 여성 노인은 작년에 칠순을 맞이했는데, 며느리가 전화해서 ‘어느 식당에 가고 싶으냐?’고 묻더라는 것이다. 노인의 말인즉, 며느리가 미리 식당을 정해놓고 가자고 해야지, 시어머니한테 그걸 물어보니까 비싼 식당에 가고 싶어도 말을 할 수가 없었고, 하도 더러워서 “칼국수를 먹을란다”고 했더니 정말로 칼국숫집으로 데려갔다는 것이다. 다른 노인이 맞장구를 치는데, 요샛것들은 다 그래, 제 돈 아끼려는 거지 뭐겠어, 요샛것들, 제 서방하고 자식만 알고, 시어미는 안중에도 없어, 아예 바라지도 마, 라고 말했다.
몇 년 전에는 추석 지나고 나서 공원에 나갔더니, 여성 노인들이 모여서 추석 쇈 얘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또 메모했다.
해마다 추석이 지나면, ‘요샛것들’이 무슨 명절증후군이라는 걸 앓는다고 신문 방송에서 하도 떠들어대길래, 전 부치고 있는 며느리한테 “너도 그 증후군이 있냐?”고 물었더니 배시시 웃으면서 대답하지 않더라고, 한 노인이 말했다. 그러자 수다의 봇물이 터지면서 ‘요샛것들’을 성토했다.
아, 요샛걸들만 증후군이 있고 늙은 것들은 증후군이 없나, 즈들만 증후군이 있느냔 말야! 늙고 병드는 거 외에 웬 증후군이 또 있냐? 고 다른 노인이 말했다.
그러자 또다른 노인이 말했다. 그건 당신들이 몰라서 하는 소리다. 내 며느리도 맞벌이하는데, 아침마다 애가 엄마하고 떨어지기 싫어서 어린이집 차가 올 때마다 운다. 우는 애를 잡아 가두다시피 차에 실어 보내고 나면 에미가 또 우는데, 울면서 화장품 찍어 바르고 출근한다. 에미는 저녁때 애 찾아와서 씻기고 먹이는데, 서방놈은 밖에서 술 퍼먹고 늦게 돌아와서 테레비 보다가 곯아떨어지는 판이니, 어찌 며느리가 견딜 수가 있겠는가, 이러니 증후군 소리가 나오는 거야. 이걸 알고 얘기를 하라고, 며느리를 욕할 게 아니라 우리 아들놈들이 정신 차려야 해. 제 아비들이 하던 대로 하면 안 된단 말이야.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알아야지.
여성 노인들은 아들 편을 들었다가 며느리 편을 들었다가, 며느리를 욕했다가 자랑했다를 반복하면서 끝없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야기는 날마다 이어진다. 누구의 삶인들 고단하지 않겠는가. 이러니 남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한 생애를 늙히는 일은 쉽지 않다.
젊은 부부들은 어린아이를 태운 유모차를 밀고 가고, 늙은 사내는 늙은 아내가 탄 휠체어를 밀고 간다. 20년 전에 지나가던 노인들은 다 지나가고 지금은 딴사람이 지나간다. 지나가는 것들은 지나가고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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