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현, [조선의 딸, 총을 들다], 인문서원, 2016
2015년 여름, 한 편의 영화가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다. 영화 ‘암살’이 그것이다. ‘광복 70주년’이라는 시의성도 작용했지만 영화 자체로도 충분히 화제가 될 만했다. 특히 여자 독립군 안옥윤(전지현 분)의 활약은 단연 주목을 끌었다. 설마 여자가 총을 들고 독립운동을 했을까. 많은 사람들이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안옥윤’은 우리 독립투쟁사에 실제로 있다. 그 모델이 바로 ‘여자 안중근’이라 불린 남자현(1872~1933)이다.
1872년 안동에서 영남의 전통 유생인 남정한의 막내딸로 태어난 남자현은 공부도 제대로 한 양반집 규수였다. 열아홉에 부친의 문하생이었던 김영주와 혼인하여 경북 영양으로 시집을 갔다. 1895년에 이른바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살해되자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을 때, 남편 김영주도 “나라가 망해가는데 어찌 집에 홀로 있을 것인가. 지하에서 다시보자.”며 영양 의병부대에 가담했다가 이듬해에 진보면 홍구동 전투에서 전사했다.
남편의 죽음은 남자현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꾸어놓았다. 졸지에 남편을 잃고 청상과부가 된 남자현은 3대 독자인 유복자 성삼을 키우며 누에를 치고 명주를 짜 내다 팔아 시부모를 봉양하여 효부상을 받기도 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이후 부친 남정한이 의병 부대를 조직하자 부친을 돕기로 하고 의병 모집과 일본군 동태 파악 및 정보수집 활동에 나섰다. 46살 때인 1918년 서울로 올라온 남자현은 이듬해 3.1혁명이 일어나자 이에 가담해 독립선언서를 배부하였다.
3.1혁명 당시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본 남자현은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만세항쟁 같은 소극적인 방식으로는 결코 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된 것이다. 특히 남편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는 무장항쟁의 필요성을 절감한 남자현은 1919년에 아들을 데리고 중국 요령성 통화현으로 망명했다. 남자현이 가입한 독립군 단체는 서로군정서였다. 이곳에서 독립군 뒷바라지를 하면서 아들 김성삼을 신흥무관학교에 입학시켜 독립군 교육을 시켰다. 또 조선인 거주 농촌 지역을 돌며 12개의 교회를 세우고 여자교육회를 설립해 여성계몽과 민족의식 고취에도 앞장섰다.
만주로 망명한 지 7년째인 1926년 4월, 남자현은 난생 처음으로 ‘거사’에 나서게 됐다. 처단 대상은 초대 조선 총독인 사이토 마코토. 해군대장 출신으로, 1919년에 이어 두 번씩이나 조선 총독을 지낸 인물이었다. 그는 이른바 ‘문화통치’를 표방하였으나 실제로는 무단통치를 능가하는 악랄한 식민통치를 폈다. 남자현은 남편과 함께 의병 활동을 했던 채찬, 박청산 등과 함께 사이토를 처단하기로 결의하고 두만강을 건넜다.
뜻밖에도 이들 말고도 사이토의 목숨을 노린 인물이 또 있었다. 송학선 의사였다. 송학선은 사진관에서 일하면서 입수한 양식칼을 품에 넣고 과자행상을 가장해 창덕궁 앞에서 사이토를 노렸다. 4월28일 오후 1시30분경, 일본인이 탄 자동차가 금호문으로 들어오자 송학선은 비호같이 자동차에 뛰어올라 이들을 찔렀다. 이른바 ‘금호문 사건’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가 찌른 일본인은 사이토가 아니라 경성부회 평의원들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총독 경호가 강화되자 남자현 일행은 어쩔 수 없이 거사를 포기하고 만주로 되돌아갔다.
1931년 일제는 만주사변을 일으켜 대륙 침략의 마수를 뻗쳤다. 그러자 국제연맹은 국제적 비난 여론에 못 이겨 이듬해 9월에 조사단(단 리튼)을 하얼빈에 파견해 진상조사에 나섰다. 남자현은 조사단에게 우리의 독립의지를 전하기 위해 자신의 왼손 무명지 두 마디를 잘랐다. ‘조선은 독립을 원한다’라고 혈서를 쓴 후 하얀 손수건에 자른 손가락을 함께 싸서 리튼 조사단에 보냈다. 독립 의지를 담아 손가락을 자른 사람은 안중근에 이어 남자현이 두 번째다. 그때의 심경을 아들 김성삼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적었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오늘 왼쪽 무명지 두 마디와 이별하려고 한다. 어쩌면 내 손을 채웠던 이 작은 것이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할 수도 있겠다 싶구나. …. 지금 내게 두려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라를 잃고 남편을 잃고, 더 이상 잃을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양반가의 할머니가 독립운동을 한다니 일견 우습게도 들릴 일이지만 현실은 그런 모양을 가릴 때가 아니다. 이 늙어가는 육신의 일부라도 흔쾌히 끊어 절규를 내놓아야 할 때도 있는 것이 아니냐? 이제 칼을 들었다.”
1926년 사이토 처단 거사는 실패했지만 7년 뒤, 기회는 다시 찾아왔다. 1933년 봄이었다. 일본 관동군이 세운 괴뢰정부 만주국 건국기념일(3월1일)을 맞아 관동군사령관 겸 일본 전권대사 무토 노부요시 육군대장이 신경(오늘날 장춘)에서 열리는 건국절 행사에 참석키로 돼 있었다. 그해 1월 초에 정보를 입수한 남자현은 무토를 처단하기로 결심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이 일은 내가 처리한다. 나는 이제 죽어도 아무런 여한이 없는 나이이니 두려움이 없다. 노부요시를 처단한 뒤 내 몸을 하얼빈 허공에 어육으로 날리리라.”
3월1일 거사에 앞서 남자현은 거사에 사용할 권총 1정과 탄환, 폭탄 등을 준비했다. 2월 29일 남자현은 신경으로 가기 위해 길림에서 하얼빈으로 왔다. 중국인 걸인 노파로 변장하였다. 사전에 약속이 된 중국인으로부터 권총과 폭탄이 든 과일상자를 건네받기로 돼 있었다. 권총과 폭탄을 건네받아 하얼빈 역으로 가던 중 하얼빈 교외 정양가에서 돌연 한 무리의 일경이 급습했다. 조선인 밀정의 밀고로 일경이 남자현의 뒤를 밟았던 것이다. 일경이 붙잡아 몸수색을 해보니 그는 남편이 전사할 때 입고 있었던 피 묻은 의병 군복을 옷 속에 껴입고 있었다. 일본 관동군 사령관을 처단하기 위해 몸에 권총과 폭탄을 숨기고 있던 남자현. 그때 나이 61살이었다.
현장에서 체포된 남자현은 하얼빈 주재 일본영사관 감옥으로 끌려갔다.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 감옥에서 6개월을 보냈다. 8월8일부터 옥중에서 단식투쟁을 벌였는데 단식 9일 만에 인사불성 상태가 되자 일경은 17일 보석으로 풀어주었다. 적십자병원을 거쳐 여관에서 몸을 추스르던 남자현은 출옥한 지 닷새 만인 22일 낮 12시 30분쯤, 조선여관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20년 간 만주 일대를 누비며 항일투쟁을 전개했던 남자현은 그렇게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장례는 이튿날인 23일 치러졌으며 유해는 하얼빈 남강 외국인 묘지에 안장됐다. 하얼빈 사회의 중국인 지사들은 그를 ‘독립군의 어머니’라고 불렀다. 우리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고, 1967년 국립묘지로 이장했다.
시인 고정희는 ‘남자현의 무명지’라는 시로 그를 기렸다.
남자현의 무명지
구한말의 여자가 다 이리 잠들었을진대
동포여, 무엇이 그리 바쁘뇨
황망한 발길을 잠시 멈추시고
만주벌에 떠도는 남자현의 혼백 앞에
자유세상 밝히는 분향을 올리시라
그때 그대는 보게 되리라
‘대한여자독립원’이라 쓴
아낙의 혈서와 무명지를 보게 되리라
경북 안동 출신 남자현,
열아홉에 유생 김영주와 혼인하여
안동땅에 자자한
효부 열녀 쇠사슬에 찬물을 끼얹고
여필종부 오랏줄을 싹둑 끊으니
서로군정독립단 일원이니라
북만주벌 열두 곳에 해방의 터를 닦아
여성 개화 신천지 씨앗을 뿌리며
국경선 안과 밖을 십여 성상 누비다가
난공불락, 왜세의 도마 위에
섬섬옥수 열 손가락 얹어놓고 하는 말
천지신명 듣거든 사람세상 발원이요
탄압의 말뚝에 국적 따로 있으리까
조선여자 무명지 단칼에 내리치니
피로 받아 쓴 대한여자독립원
아직도 떠도는 아낙의 무명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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