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가마를 타고 금강산에 오르다

이춘아 2021. 10. 3. 07:24

최선경, [호동서락을 가다, 남장 여인 금원의 19세기 조선여행기], 옥당, 2013.


[호동서락기]에는 금원이 충청 4군을 거쳐 어떻게 금강산에 갔는지 자세한 경로는 나와 있지 않지만 원주에서 출발한 그녀가 제천, 단양으로 간 것은 남한강 뱃길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당시에는 육로보다 수로가 더 빠른 길이었기 때문이다. 개항 이후 외국인 여성으로서 처음 금강산을 다녀온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역시 금원과 비슷한 경로로 금강산을 찾는다. 비숍의 경로를 따라가다 보면 금원이 갔던 코스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국의 지리학자였던 비숍은 “여자가 내륙지방을 여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1894년 4월 대장정을 시작한다. 서울 한강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여 남한강을 따라 여주, 청풍, 단양, 영춘을 둘러본 뒤 금강산으로 향한다. 금원이 4권을 돌고 금강산을 가려 했던 코스와 같다. 금원이 그랬던 것처럼 비숍도 단양에서 어느 동굴을 찾게 된다. 어느 동굴인지 자세한 묘사가 없어 확실하지는 않지만 강가에서 배를 대고 들어갔다는 것으로 보아 금굴일 가능성이 크다. 

4군을 둘러본 비숍은 다시 남한강을 거쳐 북한강을 따라 가평, 춘천으로 올라간다. 뱃길은 여기까지이고 김화(옛 통구)에서부터는 조랑말을 타고 이동한다. 금강산에서는 주로 말이나 가마를 타고 이동했는데, 비숍은 금강산 여행을 위해 두 명의 짐꾼과 남여(위가 트여있는 의자 형태의 가마)를 끌 두 명의 가마꾼을 고용하였다. 조선시대 양반들이 금강산에 오를 때 주로 금강산 사찰의 승려들이 가마를 메었던 것에 비하면 훨씬 양심적이라고 할 수 있다. 금강산에서의 숙박은 사찰에서 해결하였다. 

금원도 말을 타거나 가마를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산이 험하면 직접 걸어야 했을 것이다. 비숍도 가마로 가기 어려운 험한 길이 나오면 걸어갔는데, 그땐 자신의 유럽식 구도보다 짚신이 훨씬 오르기 편했다고 한다. 등산화가 없던 그 시절, 어떻게 산에 올랐는지가 궁금했는데, 발에 딱 붙는 소박한 짚신이 서양의 가죽 구두보다 훨씬 유용했던 모양이다. 이는 베버 신부의 글에서도 언급된다. 스틱도 없고, 등산화도 없던 시절 우리 조상은 자연친화적인 짚신과 나무 지팡이를 짚어가며 산에 올랐다. 

유람할 때 양반에게는 최소한 한두 명의 시종이 따랐으니 금원도 시종과 함께 갔다고 볼 수 있다. 출발할 때 가마를 타고 갔다거나 금강산 사찰에 머물렀다는 글을 보면 그녀가 어느정도 대우를 받으면서 산행했다고 짐작된다. 그렇다면 복장만으로도 신분을 알 수 있었던 당시에 그녀가 어떤 남장을 했을까? 양반 자제라고 거짓말을 했을까? 여자인 것이 밝혀질까 두렵지는 않았을까? 금원이 [호동서락기]에 기록하지 않은 뒷이야기들을 마음껏 상상해본다. 

“이 산을 부르는 이름이 매우 많아 금강이라 하고 지달, 중향성, 열반, 개골, 풍악, 봉래라고도 하지만 간단히 부르자면 금강이다. 금강의 내외산 봉우리는 기이한 절벽 아닌 것이 없고 물은 이름 난 폭포 아닌 것이 없다. 내산은 깎아지른 듯 험준함이 뛰어나 흰색이 많고 푸른색이 적다. 외산은 편안함이 뛰어나 푸른색이 많고 흰색이 적다.”

금원은 내산은 기암괴석과 폭포가 많아 흰색이 많다고 하였고 외산은 숲이 많아 푸른색이 많다고 하였다. 

“봉우리로는 비로, 중향, 대 소 향로, 청학, 관음, 석가, 오선, 망고, 혈망봉이 가장 기이하고 못으로는 만폭, 흑룡, 벽하, 분설, 진주, 구담이 뛰어나다. 암벽의 웅장함은 명경대, 묘길상만한 것이 없고 조망이 좋기로는 헐성루, 백운대만한 것이 없다. 골짜기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으로 모두 장안사를 추천하는데, 표훈, 보덕, 마하는 모두 내산의 명찰이다.칠보, 불정대와 석문동, 채하, 집선봉은 기이한 형상의 산이요, 선담의 물이 괴고 흐름, 비봉의 나부끼는 모습, 옥류의 구슬 같은 소리는 그다음이라. 구룡연의 장대한 물결과 험하고 기괴함은 1만 2천봉 가운데 대적할 것이 없다. 유점사란 이름은 이적에 근거한 것이나, 많은 사찰과 암자 중에서 으뜸이다. 이들이 외산에서 특별히 일컬어지는 것들이다.”

금원은 내금강의 입구라 할 수 있는 단발령에 도착하여 금강산을 바라보았다. 1만2천개의 봉우리를 본 그녀는 ‘옥을 깎아 세운 듯 서산에 쌓인 눈도 이보다 하얗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중국 연경에 있는 서산은 연경팔경의 하나로 기이한 봉우리와 절벽이 절경인데, 눈 온 뒤의 모습은 더욱 기이하다고 했다. 금원은 중국에 가보지는 않았지만 금강산을 보니, 그 기이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놀라 더는 바랄 것이 없었다. 금강산의 층층 절벽과 봉우리가 구름 가운데 솟아 있는 모습이 너무나 뛰어나 그녀는 이런 생각을 하였다. ‘이런 것이 바로 신선이 사는 선경이 아닌가! 아무리 뛰어난 화가라 하더라도 금강산을 제대로 그릴 수 없으리라.’

금강산의 초입인 장안사에 도착하자 연로한 주지승이 법당에서 내려와 금원 일행을 공손히 맞이하여 승방으로 인도하였다. 방에는 산채가 푸짐한 점심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정갈하게 차려진 밥상에서 금원은 이야기를 나누며 배불리 먹었다고 한다. 금강산을 잘 아는 승려들이 유람객을 안내하는데, 그녀도 그러한 혜택을 누렸다. 금강산 곳곳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을 상세히 적어놓은 것을 보면 그곳을 잘 아는 승려들이 해설사 역할을 한 모양이다. 밥상에서 오간 대화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금강산이 화두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