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책 이야기

웅위로운 기상이 어린 호태왕비

이춘아 2021. 10. 16. 05:31

류연산, [고구려가는 길], 아이필드, 2004.

웅위로운 기상이 어린 호태왕비

일대의 호걸 태왕의 능은 겉은 물론 속까지 말끔히 비어 있다. 그러나 능에서 450미터 거리에 능비가 있어서 그 공적을 역사에 길이 남기고 있다. 이른바 호태왕비이다. 장수왕 31년(445년)에 장수왕이 부왕 담덕, 즉 호태왕의 공로와 수묘인의 관리 제도를 알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호태왕의 호는 영락태왕,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다. 능비의 높이는 6.34미터, 동방에서 제일 큰 비석이다. 방주면이 1.43미터이다. 능비의 모양은 위가 크고 아래가 약한데 그 기세가 웅위롭고 우뚝 솟은 폼이 마치 남성의 생식기를 방불케 한다. 어떤 사람은 그것이 고구려인의 조기 생식기 숭배와 관련이 있다고 재미있는 해석을 한다. 고구려 사람들은 석재의 선택에 있어서 모양을 위주로 했고 석재의 질은 그 다음이었음을 알 수 있다고 중국 학자들은 말한다. 

고구려와 혈연관계가 없는 이로서 역사에도 흥미가 없는 이라면 이 능비를 마주하면 거대한 바위돌과 글을 새긴 옛 사람들의 극성에 혀를 내두를 뿐이다. 하지만 운명적으로 고구려와 혈연을 가진 자로, 그것도 문학인으로서는 거대한 바위돌이 지닌 거대한 비애와 거대한 통한을 가슴으로 느끼지 않을 수 없으리라. 

시인 조룡남 선생의 마음에는 광개토왕비가 “창창한 이끼를 용포로 두르고/ 통구의 언덕에 외로이 서서/ 천백 년 풍우의 긴 세월을”(‘실종된 민족’에서) 찾고 계시는 대왕님으로 비쳐왔었다. 그래서 “… 만주벌 거친 바람 옥체를 쓸고/ 차가운 비 용안을 씻어내리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 오, 나는 누구이길래/ 가슴에 통곡 같은 아픔을 느끼며/ 대왕님 품에 얼싸 안기는가?/ 바위돌의 만고의 넑을 목 메여 부르는가?”라고 통탄을 금치 못했었다. 

나의 눈에 비친 능비는 광개토대왕께서 머리 위에 높이 쳐드신 용검이었다. 그 빛나는 용검 아래 영웅적 고구려의 천군만마는 거친 만주 벌판을 파죽지세로 지쳐갔다. 또한 그것은 만주 벌판에 찍힌 거대한 외침표였다. 장검으로 개척한 영광의 시대를 한 몸에 새겨 안은 민족의 자존심이었다. 

능비의 4개 면의 비문은 도합 1,775자. 능히 판독이 가능한 글자만도 1,590자이다. 무게가 37톤이나 되는 돌을 자주 옮길 수가 없었던바 비석을 세워놓고 가늠대를 가설하고 그위에서 글을 새겼을 것이다. 그리고 글체가 앞뒤가 다른 것으로 미루어서 기술이 같지 않은 조각공들에 의해 새겨진 글이라고 한다. 그런데 진.한 이후로 비석의 조각자의 성씨를 밝히지 않았으므로 호태왕비의 조각공은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비문의 내용은 시조왕의 고구려 건국설과 광개토왕의 즉위와 사망까지의 내용 부분, 광개토왕의 주변 국가를 정벌하고 영토를 확장한 내용, 광개토왕릉을 지키는 묘지기의 배정과 준칙 등 3개 부분으로 되어 있다. 왕은 즉위 22년간에 64개의 성과 1,400여 개의 촌락을 정복하여 서북으로 요하를 건너 요서를 통합하고 백제와 신라를 굴복시켰다. 바로 호태왕비는 영토 왕장에서 특출한 공적을 남긴 광개토왕의 업적을 전하는 기념물이었다. 

거대한 화강석 석좌 위에 세워진 이 거대한 웅비는 회색 응회암의 화산석을 다듬어 만들었다. 이런 응회암 석재는 화산구 부근에서만 나는 돌로 집안 경내에서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못했다. 아마 백두산 천지 주위에서 채굴하여 옮겨왔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들을 하고 있다. 

1925년 집안 지현 유천성은 모금으로 비정을 세웠다. 높이가 3장, 너비가 3장5자나 되는 목조 건물이었는데 풍우에 침식되었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비정은 1982년에 집안현 문물관리소에서 길림성 정부의 비준을 거쳐서 다시 지은 것이다. 그리고 ‘호태왕비’라고 쓴 편액은 중국사회과학원 부원장이며 고고연구소 소장이었던 하내의 서법이다. 

호태왕비에 대한 첫 연구 논문은 유절이라는 중국인이 1928년에 발표한 것이었다. 그후 반세기 동안 잠자던 호태왕비 연구 붐을 일으킨 사람은 박진석. 1952년 연변대학 역사학부를 졸업하고 줄곧 조선고대사 연구에 40년을 종사하였다. 1981년부터 1983년 사이에 50여 편의 능비연구 논문이 발표되었는데 그 중에서 박진석 교수가 쓴 [호태왕비와 고대 조일관계연구]는 일본학계의 ‘임나일본부설’을 반박하였다. 1996년에 출판한 [고구려 호태왕비 연구]에서 그는 호태왕비문을 역사 사실에 결부시켜서 해석했고 판독이 어려운 62개 문자의 진위를 고증했으며 비문 중의 별체자를 8개류로 구분하고 60여 개 별체자의 현대 서법을 밝혀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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